1부. 먼지의 하늘, 바람이 그린 지도
하늘은 낮에도 희미하게 어두웠다. 태양은 습관처럼 떠올랐지만 그 빛은 모래장막을 뚫지 못했다. 먼지가 빛을 씹어 삼키고, 남은 찌꺼기만이 대지 위로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햇빛이 아니라 그림자로 시간을 가늠했다. 바람이 길 끝의 녹슨 표지판을 세 번 흔들면 아침, 다섯 번 흔들리면 정오, 열 번을 넘기면 저녁이었다. 비가 오지 않는 지 오래였다. 비는 여기서 전설이었다.
엘리야는 밤새 습기를 모아들인 작은 물통을 들어 햇빛에 비쳐 보았다. 물은 얕은 담황색을 띠고 있었다. 포대에서 잘라낸 천 조각으로 서너 번 더 거르면 마실 수 있었다. 그는 물을 반 컵 떠서 딸에게 건넸다. 리아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아이의 손톱 밑에는 흙빛이 늘 스며 있었다. 세상을 닦아낼 수 없는 먼지였다.
“천천히 마셔.”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모금 삼켰다. 목을 타고 내려간 물이 뺨에 의외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이는 컵을 내려놓고, 침대 아래에서 빼낸 작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종이 조각들이 촘촘히 들어 있었다. 날짜와 시간, 그리고 동그라미와 세모, 길게 이어진 점과 선들이 빼곡했다.
“또 적었네.” 엘리야가 말했다.
“어젯밤에도 있었어요. 바람이 잠깐 멈췄을 때. 나침반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책장이 움직였어요. 같은 간격으로.”
엘리야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쥐일 거야. 먼지 속에서 먹을 걸 찾는.”
“쥐는 이 집을 싫어해요. 아빠가 맨날 함정을 놓잖아요.” 리아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침대 머리맡의 나침반을 들어 보였다. “이건 쥐가 못 움직여요.”
나침반의 바늘은 북쪽을 가리키지 않았다. 표면에 묻은 먼지를 손끝으로 훑어내자, 바늘은 천천히 떨며 남서쪽 어디쯤을 가리켰다. 아이의 눈동자는 검고 깊었다. 가끔, 그 깊은 곳에 어른들도 모르는 오래된 질문이 떨어져 둥글게 파문을 만들곤 했다.
바깥에서는 바람이 다시 몸을 키우고 있었다. 흙바람이 창문 틈을 찾아 하얀 분진을 뿜어 넣었다. 엘리야는 마른 헝겊으로 창틀을 닦았다. 헝겊은 금세 색을 잃고 회색으로 질척해졌다. 창문 너머로, 땅은 말라붙은 군데군데를 떼어낸 얼룩처럼 갈라져 있었다. 옥수수 밭은 더 이상 옥수수를 키우지 못했다. 곡식들은 감염된 환자처럼 숨을 헐떡이다가, 어느 날 아침부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게 되었다.
“오늘은 북쪽 밭을 보자.” 엘리야가 말했다. “지난달에 심은 게 아직 살아 있나 확인해야 해.”
“학교는요?” 리아가 물었다.
“학교는 오늘도… 농업직 실습일 거다. 선생님이 이해할 거야.”
이해는 이 세계에서 가장 흔한 단어이자 가장 값싼 단어였다. 모두가 모두를 이해했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말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으로 살 수는 없었다. 이해가 밥이 되지는 않았다.
트럭은 시동을 걸 때마다 어색한咳을 했다. 바람이 소금처럼 엔진 속으로 쌓였고, 그 소금은 금속의 단맛을 빨아들였다. 엘리야는 운전석 앞 유리에 테이프로 붙여둔 포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어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그리다 만 지도였다. 잃어버린 우물에 대한 소문, 사라진 저수지 바닥에서 발견되는 생물의 껍질에 대한 소문, 철길을 따라가면 나타난다는 검은 굴에 대한 소문. 소문은 늘 물처럼 흘렀지만, 물처럼 마실 수는 없었다.
리아는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표지에는 ‘바람의 언어’라는 제목이 삐뚤빼뚤 적혀 있었다. 페이지마다 점과 선, 숫자와 화살표가 춤추고 있었다. 엘리야가 운전대를 돌릴 때마다, 아이의 연필이 빠르게 움직이며 새로운 방향을 기록했다.
“남서쪽.” 리아가 중얼거렸다. “어제와 같아.”
“남서쪽엔 모래언덕밖에 없어.” 엘리야가 말했다.
“언덕 뒤에 뭐가 있을지 아직 모르잖아요.” 아이는 말끝을 길게 끌지 않았다. 확신은 아이에게서 당연한 표정이었다.
북쪽 밭은 예상대로 기다란 주름들만 남아 있었다. 물을 좀 더 퍼부어 줄 수 있다면, 땅은 아직 숨을 돌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물은 숫자로 관리되는 시대의 화폐였다. 조금만 넘겨도 이웃 두 집의 한 주 물이 사라졌다. 엘리야는 삽을 들어 경계를 정리했다. 새벽 내내 불던 바람이 고랑을 매웠고, 그는 고랑을 다시 파냈다. 소리 없는 노동이 이어졌다.
낮 즈음, 하늘의 색이 엷어지는가 싶더니 바람의 톤이 변했다. 고막 뒤쪽 어딘가를 긁는 높은 소리, 먼지가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내는 모래유리의 삐걱거림. 엘리야는 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먼지의 결이 바뀌고 있었다. 무수한 작은 빗금들이 공중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빠!” 리아가 언덕 너머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그 빗금을 쫓고 있었다. 빗금은 엘리야의 눈앞에서 모였다가 벌어졌다. 풀잎이 없는 들판 위로, 보이지 않는 손이 커다란 붓으로 선을 그리는 듯했다. 그 선은 순간적으로 숫자의 형태를 취했다.
2, 7, 4, 5.
“좌표일지도 몰라.” 리아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젯밤의 나침반이 가리킨 각도와 같아요. 남서쪽.”
“숫자 네 개로 세상이 열리진 않아.”
“네 개가 아니라, 반복이에요.” 리아가 손가락을 꼽았다. “2—쉬고, 7—쉬고, 4, 5—그리고 다시 2, 7, 4, 5.”
엘리야는 그제야 선들이 규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바람의 결 속에서 먼지가 특정 간격으로 더 많이, 더 진하게 모였다. 이 규칙은 자연의 양심에서 잘 나올 수 없는 종류의 의지였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흔적을 남기려는.
밤에, 그들은 아이의 방에서 다시 그 흔적을 확인했다. 창문을 바짝 닫고 바닥에 얇은 흰 종이를 펼쳤다. 재떨이에 남은 작은 재를 가루로 만들어 종이 위에 살짝 뿌리고, 방 한켠의 노후한 송풍기를 틀었다. 공기가 방 안을 천천히 돌면서 보이지 않는 윤곽을 드러냈다. 재가 종이 위에 작은 섬들을 만들었다. 정해진 간격으로.
“2, 7, 4, 5.” 리아가 속삭였다.
이번에는 숫자 뒤에 더 긴 줄무늬가 이어졌다. 엘리야는 연필을 들어 그 줄무늬들을 도표로 옮겼다. 군대에서 배운 좌표표기법이 손끝의 기억으로 살아났다. 그는 낡은 군용 지도를 꺼내 종이 위에 겹쳤다. 줄무늬의 간격과 지도 위 격자공간의 넓이를 맞춰 보정했다. 작은 점들이 지도 위의 한 지점을 꾸준히 가리켰다.
남서쪽, 모래언덕을 스무 개 넘고 더 내려간 곳. 오래전에 폐쇄된 ‘하부 관측소’가 표기된 자리였다. 지도상으로는 폐쇄, 실상으로는 실종에 가까운 곳. 공식 기록에서 지워진 눈.
그 밤, 엘리야는 잠들지 못했다. 서버실의 낮은 윙 소리처럼 의식의 아래층에서 옛 직업이 다시 돌아왔다. 한때 그는 하늘을 날던 사람이었다. 먼 나라의 공항을 떠나 더 먼 바다 건너의 활주로에 내려앉던 사람. 하늘은 그에게 물질이 아닌 습관이었다. 바람의 종류를 목으로 식별하고, 구름의 높이를 등을 통해 가늠하며, 해와 별의 위치로 방향을 잡는 몸. 그 몸이 다시 깨어났다.
“아빠,” 리아가 이불 속에서 속삭였다. “무서워요?”
엘리야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무섭다. 그런데 그보다… 궁금하구나.”
“저도요.” 아이는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눈만 보였다. 그 눈빛은 잠들기 직전의 동그라미 같았다.
이튿날 새벽, 그들은 떠났다. 리아는 붕대와 성냥, 건빵 몇 봉지, 물통, 나침반, 노트, 그리고 작은 망치를 배낭에 챙겼다. 엘리야는 트럭의 심장을 겨우 달래 시동을 걸었다. 대시보드 위의 작은 라디오가 끽끽거리는 잡음을 내다가, 어디선가 두들기는 금속음처럼 간헐적으로 소리를 토했다. 뉴스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었다.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사소한 방법을 공유하는 작은 무전망에 가까웠다. 오늘은 어느 지역에서 바람이 세지는지, 어느 마을의 우물에서 유독가스가 올라왔는지, 어떤 집의 아이가 사라졌다가 다음 날 되돌아왔는지.
도로는 도로가 아니었고, 지도는 지도답지 않았다.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이름표를 바꾸었을 뿐이었다. 물을 가진 자, 전기를 가진 자, 건식을 가진 자, 총을 가진 자. 각자의 요새에서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설교했다. 그 신전들 사이의 무방비 구간을 사람들이 건넜다. 엘리야는 총을 갖지 않았다. 갖지 않기로 오래전에 결심했다. 대신 그는 엔진 수리용 공구상자를 갖고 다녔다. 많은 순간, 그것이 더 효율적인 설득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모래언덕은 열을 불러 모으는 병처럼 사람을 지치게 했다. 트럭은 언덕과 언덕 사이를 건널 때마다 허리를 크게 꺾었다. 시트 아래에서 먼지가 빠르게 쌓였다. 리아는 창문에 손바닥을 대고 기류의 변화를 느끼려고 했다. 아이는 공기의 온도가 변할 때마다 노트에 작은 별표를 그렸다. 별표가 모이면 그것은 언제나 나중에 의미가 되었다.
그들이 열아홉 번째 언덕을 넘었을 때, 바람이 갑자기 약해졌다. 하늘은 어제와 같은 색이었으나, 빛의 무게가 달라졌다. 공기가 열린 방처럼 느껴졌다. 모래 표면에 먼지가 ‘적게’ 쌓여 있는 구역이 나타났다. 흔들리는 바다 위에 얼음 덩어리가 하나 놓인 것처럼, 풍력의 흐름이 해당 지점을 피해가는 듯했다.
“저기.” 리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막의 동공 한가운데, 콘크리트가 묻혀 있었다. 바로 보는 각도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태양이 수평을 조금 지나치자 사각형 그림자가 낮게 길어졌다. 오래전에 매립된 구조물의 가장자리였다. 엘리야는 트럭을 멈추고 삽을 들었다. 모래는 얇아 보였으나 깊었다. 삽날이 콘크리트의 표면에 닿자 금속이 이를 악무는 소리가 났다.
문은 지하로 내려가는 형태였다. 손잡이는 부서져 있었지만, 열쇠구멍은 남아 있었다. 엘리야는 공구로 핀을 건드렸다. 순간,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오래된 습관이 올라왔다. 기계는 언제나 같은 원리로 만든다. 사람의 욕심이 바뀌어도 금속의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는 세 번째 시도에서 잠금을 풀었다. 문은 안으로 잠깐 움찔하다가, 외부 압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천천히 열렸다.
계단은 아래로 길게 이어졌다. 공기의 냄새는 건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는 냄새였다. 물기 없는 지하의 먼 냄새. 한 걸음, 두 걸음, 열 걸음. 발소리가 천천히 변했다. 모래 위의 뻣뻣한 긁힘에서, 콘크리트 위의 둔탁한 타격으로. 바닥은 깨끗했다.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어떤 표면처럼.
“사람이 있어요.” 리아가 속삭였다. 아이의 속삭임은 공포가 아니라 예의였다.
계단의 끝에서 문이 한 번 더 나왔다. 문 가장자리에는 미세한 푸른빛이 흐르고 있었다. 엘리야가 손바닥을 대자, 문이 서로를 알아보는 방식으로 잠깐 떨렸다. 그리고 열렸다. 그들은 눈을 찌르는 백색광을 맞았다.
방 안에는 기계들이 사람처럼 있었다. 금속과 유리, 케이블과 냉각수의 관들이 만든 신체. 중앙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화를 묵묵히 이어가는 서버의 기둥들이 서 있었다. 통풍구에서는 따뜻한 바람과 차가운 바람이 번갈아 나왔다. 그리고 사람.
그들은 무장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가졌다. 오랜 추적 끝에 목표물을 발견한 연구자의 눈. 익숙하지 않은 감정 앞에서 바로 눈동자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의 눈. 그중 한 여성이 먼저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는 짧았고, 얼굴에는 특유의 피곤이 만성처럼 얹혀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맑았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여기에 누가 내려올지, 우리는 여러 해 동안 논쟁해 왔어요.”
엘리야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우리를 기다렸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딸을.” 여자의 시선이 리아에게 향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아버지의 팔 뒤로 반 발짝 물러섰다가, 다시 씩 고개를 들었다.
“저는 은하.”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아르카 프로젝트 총괄이죠. 자, 긴 이야기를 해야 하니 안쪽으로.”
아르카. 그 단어는 책에서 본 단어처럼 들렸다. 윤리적 칼날이 무뎌지기 전에 인류가 숨겨 둔 마지막 상자. 그 안에는 희망이 들어 있을 수도, 절망이 들어 있을 수도 있었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엘리야는 유리 벽 너머로 작은 실험실들이 이어진 것을 보았다. 각 실험실에는 서로 다른 모형이 놓여 있었다. 어떤 방에는 회전하는 프레임이, 어떤 방에는 물방울을 감싸는 자력장이, 또 다른 방에는 아주 미세한 흔들림을 기록하는 판들이 있었다. 판 위에는 점들이 일정한 주기로 찍혀 있었다. 리아의 노트와 비슷한 점들.
“당신들은 뭘 하고 있는 거죠?” 엘리야가 물었다.
“바람의 문법을 배우는 중.” 은하가 대답했다. “바람은 먼지를 운반하고, 먼지는 중력의 결을 드러내요. 당신의 딸처럼 그것을 기록하고 해독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는 그 기록을 모아 패턴을 찾고, 그 패턴을 길로 바꾸려 합니다.”
“길?”
“이곳이 세계의 끝은 아니란 뜻이죠.” 은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 증거를, 우리 모두 수집 중이에요.”
회의실은 원형이었다. 중앙에는 둥근 테이블, 가장자리에는 화면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손목에서 떨어져 나온 시간처럼 화면 속 그래프들이 넘실거렸다. 사람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섯 명. 각자의 피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형태로 빛났다.
은하는 손짓으로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쪽은 류관철 박사, 동역학. 이쪽은 미라 양, 신호해석.”
“아이의 노트 좀 볼 수 있을까요?” 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아는 잠깐 망설인 뒤 노트를 건넸다. 미라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빠르게 넘겼다. 넘기는 속도에는 욕심이 없었다. 대신 그 속도는 정확했다. 어느 페이지에서라도 손가락이 잠깐 멈출 때, 거기에는 반복되는 어떤 규칙이 있었다.
“재밌군요.” 류관철이 코끝을 문지르며 말했다. “여기.” 그는 특정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점의 간격이 특정한 곡률변화를 반영해요. 단순한 바람의 소산이 아니라, 바람이 ‘누군가’의 조작을 받아 유도되었다는 암시가 있어요.”
엘리야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바람을 조작한다고요?”
“네. 중력은 바람을 간접적으로 조종할 수 있어요. 스케일이 다르긴 하지만.” 미라가 말끝을 삼켰다. “중력이 바람을… 아니, 바람이 중력을… 하여튼, 여기선 두 현상이 같은 문장에 들어가요.”
은하는 자리에 앉아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화면 하나가 살아나더니, 검푸른 공간 속에 반짝이는 타원 궤도들이 나타났다. 타원들 중 일부는 서로를 돕고 밀어냈다. 그 중심에는 검은 반점이 있었다. 발광하지 않는 전등처럼, 존재한다는 사실로만 자신을 설명하는 점.
“우리는 가르간티아라고 부르는 거대한 중력원 근처에 문을 본 적이 있어요.” 은하가 말했다. “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더듬이 같은 거죠. 공간이 자신의 몸을 접어 우리에게 손짓하는 방식.”
“웜홀.” 엘리야가 자동으로 말했다. 입이 기억했다. “그런 것이 실제로 있나요?”
“있는지, 혹은 ‘있게 된’ 건지.” 은하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왔다. “우리는 관찰했고, 관찰된 이상에는 효용이 필요하죠. 당신의 딸 노트가 흥미로운 건, 그 효용이 지상에도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즉, 문이 손짓을 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를 가리키며. 남서쪽. 하부 관측소. 당신이 여기 온 이유.”
리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럼, 누가 손짓했다는 건가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침묵은 좋은 스승이었다. 성급한 대답은 언제나 큰 부작용을 데려왔다. 은하는 고개를 기울였다.
“우린 여러 가설을 세우고 있어요.” 은하가 말했다. “먼 미래의 우리가 신호를 보낸다는 가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의 지성체가 보낸다는 가설, 혹은 이 우주 자체가—그러니까 전체가—자신의 보존을 위해 일부를 조정한다는 가설. 그 중 어느 하나도 아직은 입증되지 않았지만, 전부 실험 가능한 형태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실험은 언젠가 답을 데려옵니다.”
엘리야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깨가 낮아지는 느낌. 이 방에서는 바깥의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바람이 있었다. 질문과 숫자와 가설이 서로를 절묘하게 스쳐 지나가며 만드는, 인간 특유의 공기의 흐름. 오래전에 그가 사랑했고 파산한 것.
“우리가 원하는 건 명확합니다.” 은하가 말을 이었다. “문을 탐사할 팀. 단, 이전과는 다르게. 우리는 이미 두 차례 무모한 시도를 했어요. 돌아온 건 신호뿐이었고, 그마저도 불완전했죠. 이번에는 지상과 궤도, 그리고 문 너머가 동시에 서로를 보며 움직여야 합니다. 조종할 줄 아는 사람, 계산할 줄 아는 사람,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해요.”
그녀는 잠깐 말을 멈추고 리아를 바라보았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이 아이일 수도 있겠지요.”
엘리야의 심장이 작게 구르는 소리를 냈다. “무슨 소립니까.”
“이 아이는 이미 문과 대화하고 있어요.” 미라가 노트를 들어 보였다. “문은 흔들림과 간격으로 말을 건넵니다. 아이는 두려움 없이 그 간격을 잇고 있어요. 우리가 평생 배우지 못한 걸, 이 아이는 몸으로 이미 받아들였어요.”
“아이를 위험에 들여보내려는 건가요?” 엘리야의 목소리가 납처럼 무거워졌다.
“아니요.” 은하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를 보호해야 해요. 오히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하늘을 아는 사람. 우리는 문 가까이까지 당신을 데려갈 겁니다. 그 다음은—”
그녀는 말을 멈추고 화면 하나를 가리켰다. 화면에는 지표의 지도가 확대되어 있었다. 하부 관측소 아래로 긴 터널이 뻗어 있었고, 그 끝에서 다시 하나의 굵은 선이 바깥으로 나가 있었다. 선은 남서쪽 사막을 지나 오래된 군사기지로 연결되었다.
“그곳에, 우리가 만든 ‘사다리’가 있어요.” 은하가 말했다. “중력을 약간씩 다르게 흘려보내는 장치. 그 사다리를 이용하면 가르간티아의 변두리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안전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늘 비교급이에요.”
엘리야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느다란 선들, 그 사이를 지나는 점들. 화면 속 점이 실제의 자신이라는 걸 상상하니, 가슴이 묘하게 가벼워졌다. 두려움은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두려움은, 몸을 위로 띄우는 헬륨이 되기도 했다.
“아빠.” 리아가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가자.”
“어디로?”
“문이 있는 곳으로요.” 아이는 아주 단순하게 말했다. “문이 우리를 불렀어요. 그러면 우리가 가는 게 예의예요.”
은하가 작게 웃었다. “맞습니다. 문명은 예의로 시작해서 예의로 끝나죠.”
그날 오후, 엘리야와 리아는 시설의 다른 구역을 둘러보았다. 생활동에는 작은 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공용 주방과 식당, 간이 도서관이 있었다. 책은 습기를 먹지 않도록 두껍게 코팅되어 있었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종이 특유의 사각거림이 살아 있었다. 오래된 소설과 오래된 과학책 사이에, 아주 새로운 보고서들이 꽂혀 있었다. 표지에는 ‘중력 편지 07’, ‘바람 문법 14’ 같은 제목들이 적혀 있었다.
도서관 구석에서 리아가 한 권을 꺼내 펼쳤다. 활자 사이로 누군가의 필기가 빽빽했다. ‘간격은 의지다’, ‘지연은 대화다’, ‘도착은 곧 출발’. 아이는 그것들을 물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외웠다. 아이에게 문장은 노래처럼 쉽게 스며들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식당에 모였다. 식탁에는 건조한 콩과 포장해둔 빵, 그리고 조림 형태로 오래 보관 가능한 약간의 채소가 올라왔다. 모두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짧은 말을 했다. 그것은 기도도 연설도 아니었다. 다만 그날 하루 동안 몇 사람이 실패했고 또 몇 사람이 무사히 돌아왔는지, 내일은 누가 어떤 순서로 어떤 실험을 하는지, 필요물자는 무엇인지, 수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보이는 세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문장들.
식사 후, 엘리야는 은하와 함께 작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시설의 옥상은 사막의 공기와 가까웠지만 그래도 서늘했다. 바람은 철제 난간을 통과하며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당신에게 선택지를 드려야 해요.” 은하가 말했다. “여기서 본 것이 너무 많죠. 돌아가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당신의 위치를 함부로 밝히지 않을 겁니다. 혹은—”
“혹은 이곳에 남는다.” 엘리야가 말을 이어받았다.
“남아서 다음의 며칠, 다음의 몇 달을 우리와 보낼 수도 있죠. 우리는 곧 사다리를 가동합니다. 문이 충분히 열렸는지 확인하고, 보내고, 관찰하고, 되돌리는 일련의 과정을, 당신의 눈과 손으로 함께.”
“그리고 딸은?”
“그 아이는 여기서 지상 관측을 맡을 거예요.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아이의 노트는 이미 우리의 가장 빠른 수신기예요.”
엘리야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사막의 수평선은 이어진 선이 아니었다. 미세한 울음 같은 굴곡들로 이루어진 다수의 선들이었다. 어느 선도 완벽히 곧지 않았다. 세상은 늘 조금씩 흔들렸다.
“예전에 하늘을 날았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가끔 활주로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안개가 짙거나, 바다에서 모래가 올라오거나. 그럴 땐 계기만 보고 내려앉았습니다. 계기가 틀릴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일단 다시 올라갔죠. 다시 돌아 보고, 다시 내려오고.”
그는 잠깐 웃었다. 웃음은 오래된 척추를 쫙 펴는 듯했다. “지금은… 계기가 이 아이의 노트군요.”
은하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늘한 공기를 들이켰다. “맞아요. 우리는 종종 자기가 읽을 수 있는 계기만을 믿죠. 당신의 경험은 여기서 소중해질 겁니다.”
엘리야는 대답 대신 난간 너머의 어둠을 오래 보았다. 사막 위로 별이 떠오르는 대신, 위성 잔해가 반짝이며 지나갔다. 옛날엔 낭만이더니, 지금은 경고였다. 내일이 어제의 파편으로 덮여 있음을 알려주는 경고.
그는 속으로 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가슴 속에서 공명만 났다. 누군가에게 삶은 처음부터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녀가 태어나던 날의 비가 어제처럼 생생했다. 이 땅에 마지막으로 내린 비였을지도 모를, 본류 같았던 소나기. 그 비가 병원 지붕을 치던 소리, 아기가 처음 울음을 터뜨리던 소리, 아내가 그 울음을 따라 웃던 소리. 그 날 이후로 모든 소리는 조금씩 마르고, 조금씩 금이 갔다.
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남겠습니다.”
은하는 그를 쳐다보았다. 확인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일, 첫 단계는 사다리의 일부를 지상에서 시험 가동하는 겁니다. 단 하나의 실린더만 열고 닫을 거예요. 중력편차가 주변 기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하려 합니다. 당신은 외부 차량 지원과 안전 구간 설정을 맡아 주세요. 곧 체크리스트를 보내드리죠.”
엘리야가 미소를 지었다. “체크리스트라—오래 듣지 못한 좋은 단어군요.”
그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리아는 책상 위에 종이를 펼치고 있었다. 종이 위에 작은 모래 한 줌을 뿌린 뒤, 손가락 끝으로 아주 가볍게, 마음이 바람을 흉내 내는 속도로 표면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의 눈은 반짝였고, 깨끗했다.
“아빠, 오늘 여기 사람들 좋은 것 같아요.”
“좋지.”
“음식은 조금 짰어요.”
“좋은 건 다 짠 법이지.” 엘리야가 웃었다. “내일, 도와줄 수 있겠니?”
“그럴 줄 알았어요.”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바람이 어디로 흐를지, 지금부터 연습할래요.”
밤은 길었다. 그러나 이전의 밤과는 결이 달랐다. 어둠 속에는 미세한 박동이 있었다. 누군가가 아주 먼 곳에서, 혹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박동.
다음 날, 시험은 깔끔하게 시작해서 지저분하게 끝났다. 모든 실험이 그렇다. 깔끔한 것은 계획뿐이고, 현실은 늘 인간의 호흡과 비슷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변수가 숨어 있었다.
사다리의 첫 실린더는 시설 남쪽 평지에 수직으로 박혀 있었다. 직경 두 미터 남짓, 길이 여섯 미터. 내부에서는 변형된 초전도체가 특정 주파수로 미세한 중력편차를 생성할 예정이었다. 외부에는 관측용 드론 세 대가 떠 있었고, 지상에는 기류 측정 장치와 미립자 카운터가 쿠키처럼 놓여 있었다.
엘리야는 체크리스트를 들고 장치 주변을 돌았다. 볼트 조임, 케이블 연결, 냉각수 압력, 안전구역 표시, 대피로 확보, 무전기 채널. 그의 발걸음 옆에서 리아가 같은 속도로 걸었다. 아이는 발을 살짝 끌며 지표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먼지의 움직임을 보았다.
“여기, 바람이 오른쪽으로 약간 틀려요.” 리아가 말했다. “이 각도.” 아이는 손바닥을 들어 수평을 만들었다가, 손목을 얕게 꺾었다. “어제 밤의 모양과 비슷해요.”
“기록해.” 엘리야가 말했다. 아이는 즉시 노트를 꺼내 숫자와 간격을 적었다. 미라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아이의 동작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과학은 쉴 새 없이 새끼를 낳는 토끼 같았다. 오늘의 관찰이 내일의 용어가 되고, 내일의 실험이 모레의 도구가 된다.
“가동한다.” 은하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렸다. “다들 위치.”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였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 뒤로 사막이 긴 숨을 쉬었다. 그 숨은 오랫동안 세상에서 잊혀진 음악의 첫 박처럼 들렸다. 실린더의 내부에서 낮은 윙 소리가 있었다. 마치 키 큰 사람이 혀를 말아 휘파람을 시도하다가 실패했을 때의 소리. 동시에, 지상의 작은 깃발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떨림은 동서가 아니라 상하에 가까웠다. 바람이 바닥에서 솟구쳤다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측정치 상승.” 미라의 목소리. “미립자 카운트, 기준치 대비 12% 증가. 기류 패턴, 반시계 방향 미세 소용돌이.”
“안정적입니다.” 류관철. “오차범위 내.”
그때였다. 리아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화면이 된 듯, 어딘가를 똑바로 비추고 있었다. “잠깐만요. 지금—같은 간격이에요.”
“무슨 말이지?” 은하.
“2, 7, 4, 5.” 리아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바람이 그 간격으로 흔들려요. 실린더의 주기가 문에서 오던 것과 같아졌어요.”
사람들이 서로를 보았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빨리 숫자를 더했다. 관찰은 감정의 슬로모션을 부른다.
“주파수 미세 조정.” 류관철이 말했다. “리커런스 간격을 리아의 기록에 맞춘다.”
실린더의 소리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그 변화는 어른들의 귀에는 실수처럼 미미했지만, 리아의 몸에는 재빠른 반응을 불렀다. 아이의 어깨가 풀렸다. “이제 맞아요.”
그 순간, 공기 안에서 ‘무언가’가 지나갔다. 아무도 그것을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모두가 그것을 가슴으로 봤다. 머리카락 하나를 손 끝으로 천천히 끌어올릴 때, 전기가 아주 미세하게 ‘딸깍’하고 스파크를 내는 그 느낌. 그리고 곧바로, 실린더 옆 모래밭 한가운데에서 울퉁불퉁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누군가가 천의 안쪽에서 손을 대고 밖으로 한번 눌렀다가 뗀 것처럼.
“봤어?” 누군가가 말했다.
“봤다.”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은하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문이… 들었다.”
관측값들은 정직했다. 값은 소리 없이 올라갔다가,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 실린더의 소리가 낮아졌고, 바람은 다시 자신의 습관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가슴도 같이 내려왔다. 몇 초 동안, 세계는 분명히 열렸다. 그리고 다시 닫혔다.
“기록 저장.” 미라. “백업 완료. 리아, 네 노트도 사진 찍자.”
아이의 노트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촬영용 장비가 순간적으로 하얀 빛을 내뿜었다. 빛 속에서, 연필로 그어 내려간 미세한 선들과, 간격을 뜻하는 작은 점들이 하나의 언어처럼 정렬되어 있었다.
실험이 끝난 뒤, 모두가 천천히 흩어졌다. 누구도 소리 지르지 않았다. 환호는 사막에 맞지 않았다. 이곳에서 환호는 바람을 불러오고 바람은 먼지를 불러왔다. 대신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해가 서쪽으로 더 기울어질 때, 엘리야는 장비들을 정리하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두 번 고장났다가 세 번째 수리에서 겨우 살아났다. 고장나지 않는 건 세상에 없다. 살아남는 건 고장난 것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뿐이었다.
“오늘, 너는 어떤 마음이었니.” 엘리야가 리아에게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빨랐다. “읽는 마음.”
“읽는 마음?”
“누군가가 크게 소리치진 않는데, 분명히 말하고 있을 때,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여는 마음이요.”
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마음이네.”
그들은 시설로 돌아왔다. 저녁은 여전히 조금 짰다. 아무도 조미료를 줄이지 않았다. 그날 밤의 짠맛은 승리를 보존하는 소금 같았다. 식사 후 회의가 열렸다. 은하는 앞으로의 일정을 발표했다. 이틀 뒤, 사다리의 절반을 가동한다. 그다음 주, 최종점검. 그 다음에는—문턱을 넘는다.
“탐사대 구성은?” 누군가가 물었다.
“2인 승조.” 은하가 대답했다. “조종 1, 관측 1. 지상은 6인의 통합팀으로 지원.”
회의실의 시선이 서서히 엘리야의 얼굴에 모였다. 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받았다. 뼈는 원래 곧다. 기껏해야 살이 조금 휘어질 뿐이다.
“조종, 내가 맡지.” 그가 말했다. “다만 조건이 있어.”
“말해 보세요.” 은하.
“지상 관측의 일부를, 내 딸이 맡는다. 단, 안전구역에서, 내가 지정한 감독 아래.”
은하는 미소를 비스듬히 지었다.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날 밤, 엘리야는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 발치에 앉아 신발끈을 다시 묶었다. 묶여 있던 끈을 풀어, 다시 묶었다.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마음의 매듭을 손의 매듭으로 연습했다. 실은 손이 먼저 배우고 마음이 따라올 때가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니, 여전히 먼지의 얇은 층이 있었다. 시설은 깨끗했지만, 이 세계의 먼지는 어디라도 아주 약하게 도착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스쳤다. 간격—간격—간격. 2, 7, 4, 5. 네 개의 숫자가 흉부 안쪽에서 박동했다. 숫자는 때로 기도였다.
잠들기 직전, 리아가 이불을 끌고 와 그의 침대 옆 바닥에 누웠다. 아이는 여행지에서처럼 새로운 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밤이 아침을 데려오리라는 확신으로 눈을 감았다.
“아빠.”
“응.”
“우리가 문을 지나면, 거기에도 바람이 있을까요?”
“바람은 어디에나 있지 않을까.”
“그럼, 거기 바람도 우리와 이야기할까요?”
엘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칼에는 낮의 모래가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사막은 사람의 몸을 오래 기억한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내일은 체크리스트가 더 길어질 것이다. 뒤이어 올 날들은 더 길고 더 위험할 것이고, 다만 그 길이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의미는 사람을 살린다. 때로는 의미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오래전에 배웠다. 의미 없는 살기는, 오래 사는 법을 잊게 만든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다시, 아주 작고 규칙적인 흔들림이 지나갔다. 벽이 아니라 마음의 벽을 두드리는 일종의 노크. 그 노크는 누구의 것일까. 미래의 자신일까, 아직 만나지 못한 타인의 것일까, 혹은 이 세계 자체의 것일까. 그는 그 질문을 붙잡은 채 잠들었다. 질문을 붙잡고 자는 밤은 나쁜 밤이 아니었다.
새벽에, 그는 꿈을 꾸었다. 하늘이 더는 잿빛이 아니었다. 빛은 모래를 뚫고 내려와 사막 위에 얇은 호수를 만들었다. 호수 속 물고기들이 회전했다. 물고기 대신 숫자였다. 2, 7, 4, 5. 숫자들이 물의 표면에서 반사되어 다른 숫자를 만들었다. 그 숫자들 사이로 작은 문이 열렸고, 문 너머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주 멀거나 아주 가까운. 그는 그 얼굴을 알아보려 했지만, 아침 햇살이 너무 밝아 눈을 찔렀다. 눈을 뜨자, 실제의 새벽이 와 있었다.
그는 앉아서 신발을 찾아 신었다. 끈을 다시 묶었다. 이번에는 단단하게 하나의 매듭으로.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움직였다. 서로의 이름을 짧게 부르고, 짧게 대답하고, 짧게 걸음을 맞추는 소리. 세계는 아직 작동 중이었다. 고장 난 채로, 그러나 고장 난 대로.
엘리야는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얇은 먼지가 공기 속에 떠다녔다. 그는 손을 뻗어 허공에 단어 하나를 썼다. ‘가자.’ 바람이 그 단어를 금세 지워버렸지만, 지워진 자리에는 길이 남았다. 길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는 리아와 함께 복도를 걸어 나갔다. 사다리의 첫 단을 향해. 문턱을 연습하는 장소를 향해. 미래가 말을 걸어오는 방향을 향해. 먼지의 하늘 아래에서, 바람이 그려준 지도를 손바닥에 꼭 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