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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에게 보내는 편지 - 4부. 시간을 마시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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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시간을 마시는 바다


1. 낯선 해안

노마드는 아치 너머의 궤도를 선회한 뒤, 서서히 행성의 표면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센서가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광활한 바다’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의 바다와는 전혀 달랐다. 그곳은 마치 액체이면서 동시에 거울 같은 성질을 지닌, 묘한 유체였다. 표면은 끊임없이 물결쳤지만, 그 물결은 위로가 아니라 옆으로 번져 나갔다.

“저게… 바다인가요?” 엘리야가 조심스레 물었다.

“물리적 분석으로는 액체.” 은하가 계기판을 확인하며 말했다. “하지만 밀도와 굴절률이 일정하지 않아. 빛이 들어가면 마치 시간이 휘어지는 것처럼 반사돼.”

노마드는 해안에 착륙했다. 발밑의 대지는 모래와 흡사했으나, 걸을 때마다 잔잔한 공명음이 울렸다. 마치 모래알 하나하나가 시간을 담아 두고, 발소리에 반응하는 듯했다.


2. 바람의 기록

지상의 리아는 새로운 신호를 감지했다. 이번에는 숫자가 아니라, 길고 불규칙한 파동이었다. 그녀는 노트 위에 곡선을 그려 넣었다. 곡선은 마치 물결처럼 이어졌다.

“이건… 바다의 리듬이에요.” 리아가 말했다.

미라는 데이터를 확인했다. “맞아. 행성의 바다에서 반사된 파동이 지상까지 전송되고 있어. 그런데 이상하네.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길게, 짧게, 또다시 길게….”

리아는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다. “이건 숫자가 아니라, 시간이에요. 바다가 시간을 마시고 있어요.”

모두가 놀라 리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이의 직관은 언제나 정확했다.


3. 시간의 왜곡

은하와 엘리야는 바다 가까이 다가갔다. 수면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현재의 것이 아니었다. 은하의 얼굴은 몇 초 늙어 있었다. 엘리야의 얼굴은 몇 초 젊어 보였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흔들리고 있어.” 은하가 숨을 죽였다. “이 바다는 빛과 중력을 함께 마셔. 그래서 우리 모습이 과거와 미래로 동시에 비쳐 보이는 거야.”

엘리야는 손을 내밀어 바닷물에 닿았다. 순간, 손끝에 찌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마치 수많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그는 잠시 어린 시절의 장면을 보았다. 옥수수 밭에서 뛰어놀던 소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웃음. 그리고 동시에, 미래의 자신이 보였다. 늙고, 지친 얼굴. 그러나 여전히 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

“이건… 경고다.” 엘리야가 낮게 중얼거렸다.


4. 지상에서의 이상 신호

아르카 기지의 모니터가 갑자기 요동쳤다. 류 박사가 소리쳤다. “시간 지연이 발생하고 있어! 노마드에서 오는 신호가 몇 초 늦게 도착하고 있어!”

“몇 초 차이죠?”

“처음엔 3초였는데, 지금은 12초…. 더 늘어나고 있어!”

모두가 긴장했다. 그러나 리아는 노트 위에 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빠는 지금, 저와 같은 시간을 걷고 있어요. 바다가 시간을 마셔도, 우리를 갈라놓을 순 없어요.”


5. 바다의 심장

은하와 엘리야는 바다 깊숙한 곳에서 이상한 진동을 감지했다. 그것은 단순한 파동이 아니라, 명확한 신호였다.

“주파수 2745….” 은하가 속삭였다.

엘리야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리아가 기록하던 숫자잖아.”

“맞아. 이 바다는 리아와 대화하고 있어. 아이의 노트에 남은 패턴이… 바로 이곳에서 온 거야.”

그들은 동시에 깨달았다. ― 바다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이 남긴, 또 다른 기록 장치였다. 시간을 저장하고, 다시 꺼내 보여주는 바다.


6. 첫 번째 시험

탐사 임무는 위험해졌다. 바다의 수면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물의 파도가 아니었다. 시간의 파도였다. 파도가 스치자, 은하는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병원 복도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녀. 그 기억이 눈앞에 선명히 재현되었다.

“안 돼, 집중해!” 엘리야가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역시 환영을 보았다. 지상에 있는 리아가 어른이 된 모습이었다. 성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파도는 지나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 짧은 순간, 그들은 수십 년의 시간을 동시에 체험한 것이었다.


7. 지상과의 연결

리아는 무전을 붙잡았다. “아빠! 아빠, 듣고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잡음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린다…. 리아, 이 바다는 네가 본 숫자와 같은 노래를 하고 있어. 우리는 지금… 시간을 마시는 바다 위에 있다.”

리아는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그녀의 머리칼을 스쳤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 아버지와 자신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8. 바다의 중심으로

은하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엘리야, 이 바다는 단순한 위험이 아니야. 여기에… 열쇠가 있어. 문이 왜 우리를 불렀는지, 그 이유가.”

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더 깊이 들어가야 해.”

노마드는 다시 떠올라 바다 위를 비행했다. 수면 아래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있었다. 소용돌이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시간의 중심 같았다. 그 속에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새로운 문양을 만들고 있었다.

은하는 숨을 죽였다. “저건… 새로운 문이다.”


9. 새로운 문턱

노마드는 소용돌이 중심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계기판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어떤 바늘은 빠르게 돌아갔고, 어떤 바늘은 멈췄다. 엘리야는 몸으로 조종했지만, 그것조차 의미를 잃어갔다.

“시간이 우리를 삼키고 있어!” 은하가 외쳤다.

“아니, 시간을 시험하고 있는 거야.” 엘리야가 이를 악물었다. “우리가 진짜로 넘어갈 자격이 있는지.”


10. 결의

그 순간, 리아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울렸다. 그러나 그것은 몇 초 늦은 목소리가 아니라, 동시에 과거와 미래의 목소리였다. 어린 리아와, 어른이 된 리아가 함께 말하는 듯한 울림.

“아빠, 두려워하지 마세요. 시간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아요. 시간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주는 길이에요.”

엘리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조종간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좋아, 바다여! 우리를 시험해라! 우린 준비됐다!”

노마드는 소용돌이 속으로 돌진했다. 바다는 거대한 입을 벌려 그들을 삼켰다. 순간, 빛과 어둠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11. 시간을 마신 자들

그리고 ― 정적.

엘리야와 은하는 눈을 떴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였다. 끝없이 펼쳐진 수면 위에, 수많은 문들이 떠 있었다. 그 문들은 빛으로 만들어졌고, 각기 다른 리듬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이건… 선택이야.” 은하가 속삭였다. “우리가 어떤 시간을 걸을지, 선택하라는.”

엘리야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리아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시간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는다. 시간은 다시 만나게 한다.

그는 무전을 눌렀다. “리아, 기다려라. 우린 반드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문이 무엇인지, 끝까지 알아내겠다.”

노마드는 새로운 문 앞에 멈췄다. 그것은 마치 첫새벽의 빛을 닮은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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