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얼음꽃 정원의 불빛
1. 차가운 숨결
노마드가 시간을 마시는 바다의 소용돌이를 넘어섰을 때, 그 앞에 펼쳐진 것은 눈부신 얼음의 평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얼음이 아니었다. 얼음의 결정체마다 빛이 깃들어 있었고, 마치 꽃잎처럼 겹겹이 펼쳐졌다. 눈앞에는 거대한 정원이 있었다.
“이건… 얼음인데, 살아 있어.” 은하가 숨죽여 말했다.
“숨 쉬는 것 같아.” 엘리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꽃 하나하나가 일정한 간격으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심장처럼, 마치 호흡처럼. 그리고 그때마다 희미한 불빛이 정원 위로 피어올랐다.
2. 지상에서의 반향
아르카 기지의 모니터에도 변화가 감지되었다. 리아는 노트에 새로운 신호를 받아 적었다. 이번에는 숫자도, 단순한 파동도 아니었다. 종이 위에 남겨진 것은 꽃 모양의 패턴이었다.
“불빛이… 노래해요.” 리아가 속삭였다. “꽃이 피었다 지듯이, 노래하고 있어요.”
미라가 데이터를 분석하며 중얼거렸다. “이건 단순한 빛이 아니라, 정보야. 정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억 장치일 수도 있어.”
류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의 바다가 기록을 저장했다면, 이 얼음꽃 정원은 기억을 빛으로 보여주는 거지.”
3. 얼음의 언어
엘리야와 은하는 정원 위를 천천히 걸었다. 발밑의 얼음은 투명했고, 그 속에는 끝없이 얽힌 무늬들이 있었다. 얼음 속 문양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명백한 언어였다.
“간격… 점… 선….” 은하가 중얼거렸다. “이건 우리가 해독해온 바람의 문법과 같아. 다만, 바람이 아니라 빛으로 쓰인 것.”
엘리야는 손을 뻗어 얼음꽃 하나에 닿았다. 순간, 얼음은 은빛으로 번쩍이며 그의 기억을 비췄다. 그것은 리아가 어린 시절 그와 함께 그네를 타던 장면이었다. 웃음소리, 햇살, 먼지 없는 하늘.
“내 기억을 보여주고 있어….” 엘리야의 목소리가 떨렸다.
“얼음꽃은 시간과 기억을 동시에 담고 있나 봐.” 은하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여긴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우주 도서관이야.”
4. 불빛의 합창
정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불빛은 강해졌다. 수많은 얼음꽃들이 동시에 빛나며, 정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합창단처럼 울려 퍼졌다.
“저건 음악이야.” 엘리야가 중얼거렸다. “시간의 바다에서 리아가 들은 노래와 같아.”
“그렇다면…” 은하는 숨을 죽였다. “이 노래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는 거야. 문명, 혹은 존재 그 자체의 이야기.”
빛은 점점 문양을 이루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한순간, 거대한 형상을 만들었다. 인류가 알지 못하는 존재의 그림자. 팔과 다리를 닮았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형태. 그 존재는 정원의 한가운데 서서, 빛으로만 이루어진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5. 지상의 해독
아르카 기지의 모니터가 동시에 울렸다. 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종이에 손을 달리며 불빛의 패턴을 옮겼다. 그 선들은 곧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
“‘우리는 기다렸다’….” 리아가 해석했다.
미라가 경악하며 물었다. “뭐라고?”
“꽃들이 말했어요.” 리아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는 기다렸다. 아주 오랫동안.”
류 박사가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단순한 발견이 아니야. 인류가 처음으로 직접 듣는, 타 문명의 인사일지도 몰라.”
6. 아버지와 딸
노마드의 통신에 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아빠, 꽃들이 말을 하고 있어요. 기다렸다고 해요. 우리를.”
엘리야는 눈을 감았다. 정원의 빛이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무전을 잡고 낮게 말했다. “리아, 넌 항상 말했지. 바람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난 믿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는 안다. 네가 옳았어.”
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빠, 무섭지 않아요?”
“무섭다.” 엘리야가 솔직히 대답했다. “하지만, 네 목소리가 있으면 두렵지 않다.”
7. 얼음꽃의 시험
정원의 중심부에서 갑자기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얼음꽃들이 동시에 빛을 모으며 하나의 문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은 곧 사라질 듯 불안정했다.
“우릴 시험하는 거야.” 은하가 이를 악물었다. “정원의 문을 열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야.”
엘리야는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좋아, 받아들이자.”
불빛은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 순간, 두 사람은 각자의 기억 속으로 깊이 끌려 들어갔다.
엘리야는 리아가 태어나던 날을 다시 보았다. 비가 내리던 병원 창가, 울음을 터뜨리던 아기, 웃고 있던 아내. 그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났다.
은하는 어린 시절, 밤하늘을 보며 별을 세던 기억을 보았다. 그때부터 이미 그녀는 이 길을 걷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빛은 기억을 삼키고, 동시에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문은 천천히 열렸다.
8. 새로운 빛
정원의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또 다른 세계였다. 이번에는 불빛이 아닌,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는 작은 별빛들이 무수히 떠 있었다.
“저건… 씨앗이야.” 은하가 속삭였다. “별의 씨앗.”
엘리야는 숨을 죽였다. “정원이 우리를 어둠으로 보내려는 건가….”
무전기에서 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무서워하지 마세요. 꽃은 죽지 않아요. 불빛은 언제나 다시 피어나요.”
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길잡이였다.
9. 끝과 시작
노마드는 정원의 문 앞에 멈췄다. 얼음꽃들은 마지막으로 강하게 빛나며, 불빛의 노래를 합창했다. 그것은 분명한 말이었다.
“들어가라.”
엘리야는 은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두려움보다 확신이 더 강했다.
“가자.” 엘리야가 말했다.
노마드는 불빛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정원의 문이 닫히며, 그들을 어둠과 씨앗의 세계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