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블랙선 서고의 사서
1. 끝없는 선
노마드가 어둠 속 신호를 통과했을 때, 그 앞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이 펼쳐졌다.
빛도, 별도, 행성도 없었다. 대신 공간 전체가 무수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선들은 검은 빛줄기처럼 뻗어 있었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마치 우주의 바닥에 새겨진 무한한 필기선 같았다.
“이건… 선들이야.” 은하가 숨죽였다. “빛이 아니라, 기록의 흔적.”
엘리야는 노마드를 감싸는 창을 통해 주변을 둘러봤다. 선들은 서로 교차하지 않았다. 오직 평행하게 뻗어 있었고, 각각 고유한 진동을 내고 있었다. 그 진동은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했다.
“이곳이… 서고구나.” 엘리야가 낮게 중얼거렸다. “우주가 자기 이야기를 보관하는 곳.”
2. 지상의 반향
아르카 기지의 모니터도 갑자기 어두워졌다. 전자 신호 대신, 검은 선들이 화면 위에 하나둘 나타났다.
“장치가 고장 난 게 아니야.” 류 박사가 말했다. “우린 지금, 노마드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서고의 흔적을 받고 있어.”
미라는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이건 파형이 아니라, 문장….”
리아는 노트 위에 연필을 움직였다. 검은 선들을 따라가며 무늬를 옮겼다. 선들은 곧 한 문장을 이루었다.
“‘모든 시간은 여기에 보관된다.’”
아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진실의 울림이었다.
3. 사서의 등장
갑자기, 노마드 앞의 선들이 요동쳤다. 검은 선들 사이에서 거대한 형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과 닮았으나, 뚜렷하지 않았다. 선들이 모여 형체를 만들었고, 그 형체는 마치 두루마리를 펼치듯 긴 손을 내밀었다.
“사서다….” 은하가 속삭였다.
그 존재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마드 내부 전체가 울렸다. 진동은 곧 언어가 되었다.
“여기는 블랙선 서고. 나는 그 기록을 지키는 자.”
엘리야는 본능적으로 물었다. “무엇을 지키는가?”
“모든 시간. 모든 선택. 모든 종말과 모든 시작. 그것들이 여기 저장된다. 나는 그것을 정리하고, 간직한다.”
4. 시험
사서는 거대한 손을 뻗어 노마드를 감싸듯 둘렀다. 순간, 엘리야와 은하는 각자의 눈앞에 환영을 보았다.
엘리야는 미래의 장면을 봤다. 지상에서 홀로 늙어가는 리아. 그는 돌아가지 못했고, 아이는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얼굴은 지쳐 있었고, 눈빛은 무너져 있었다.
은하는 과거의 장면을 봤다. 연구를 시작하기 전, 어린 자신이 별을 세며 꿈꾸던 모습. 그러나 동시에, 실패로 모든 동료를 잃는 미래의 장면도 함께 보았다.
사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는 진실을 보관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새로 쓸 것인가?”
5. 지상에서의 응답
리아도 같은 환영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노트 위에, 손이 저절로 움직이며 글을 남겼다.
“아빠가 돌아오지 못하는 길.”
“아빠가 돌아오는 길.”
두 문장이 동시에 적혔다.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무전을 붙잡았다. “아빠, 사서가 두 개의 길을 보여줘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예요?”
엘리야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리아, 네 생각은 어떠니?”
아이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단호했다. “진실을 새로 써야 해요. 기록은 지키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하니까.”
6. 갈등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진실을 바꾸면 위험해. 역사는 무너질 수 있어.”
엘리야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역사는 이미 무너져 왔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조금씩 무너지고 있지.”
사서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선택하라. 기록을 보존하거나, 새로운 기록을 남기거나.”
7. 아버지의 결의
엘리야는 무전을 눌렀다. “리아, 네가 늘 말했지. 바람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바다는 시간을 보여주고, 꽃은 기억을 노래한다고. 그리고 네가 옳았어. 이제 아빠가 믿을 차례다.”
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빠….”
엘리야는 사서를 똑바로 바라봤다. “난 기록을 새로 쓰겠다. 진실은 우리 손으로 다시 세울 것이다.”
8. 새로운 기록
사서의 눈빛 같은 검은 선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오래된 피로에 가까웠다.
“너희는 위험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생명이다.”
사서가 손을 들어 올리자, 블랙선 서고의 선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그 파도 속에서 새로운 선 하나가 생겨났다. 그것은 엘리야와 리아, 은하, 그리고 아르카 프로젝트 전체의 이름을 담은 선이었다.
“너희의 기록은 이제 여기 남는다. 그러나 동시에, 너희는 기록 너머로 나아갈 것이다.”
9. 출구
서고의 선들이 갈라지며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 길은 마치 지평선 너머로 이어진 빛의 틈 같았다.
은하는 숨을 몰아쉬었다. “저게… 출구일까?”
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가야 해.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노마드는 천천히 그 빛의 길로 나아갔다. 사서는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올려, 마치 책장을 덮듯 서고 전체를 감쌌다.
10. 진실의 무게
지상에서, 리아의 노트는 스스로 페이지를 넘겼다. 마지막 장에는 단 한 줄이 남았다.
“진실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리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눈물이 종이 위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미소 지었다.
무전기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아, 곧 돌아가겠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는 길은 이제 새로 쓰인 길이다.”
그리고, 블랙선 서고는 그들을 뒤로한 채 어둠 속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