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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에게 보내는 편지 - 9부. 떠나는 지구, 남는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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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떠나는 지구, 남는 약속


1. 지구의 황혼

지구는 점점 더 침묵에 잠겨가고 있었다.
아르카 기지의 바깥은 여전히 먼지가 휘날렸고, 하늘은 더 이상 푸르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모래폭풍이 몰려와 마을을 삼켰고, 사람들은 마스크와 필터에 의지한 채 버티고 있었다.

류 박사는 관측 데이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기 질은 점점 악화되고 있어. 10년, 아니 5년을 버티기도 힘들 거야.”

미라는 고개를 숙였다. “여기 남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없는 건가요?”

“희망은 있다.” 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빠가 말했어요. 희망은 남는 게 아니라, 만들어내는 거라고.”

아이의 목소리는 어른들보다 단단했다. 모두가 그 눈빛을 보며 잠시 침묵했다.


2. 우주의 길

한편, 노마드는 별빛의 강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중력의 노래가 가라앉은 뒤, 앞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빛의 길이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은하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여기가… 인류가 가야 할 길일지도 몰라.” 은하가 속삭였다.

엘리야는 무전을 눌렀다. “리아, 잘 듣거라. 우리가 보는 건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우주가 우리에게 건네는 대답이다. 지구가 무너져도, 길은 남아 있다.”

리아의 목소리가 잡음 속에서 울렸다. “아빠, 그 길 끝에 우리가 살 수 있는 별이 있나요?”

엘리야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단호히 대답했다. “있다. 반드시 있다. 우리가 찾을 거다.”


3. 지상에서의 결정

아르카 연구진은 긴 회의를 열었다.
“우린 선택해야 해요.” 은하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전해졌다. “지상은 곧 한계에 다다른다. 하지만 우주에는 길이 있다. 문제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을 것인가.”

류 박사는 이마를 짚었다. “전 인류를 데려갈 방법은 없어. 자원도, 기술도 부족해. 일부만이라도 보낼 수 있다면… 씨앗을 심듯, 새로운 시작을 남길 수 있겠지.”

미라가 물었다. “남는 자들은요?”

회의실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그러나 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남는 사람들도 의미가 있어요. 지구는 사라지지 않아요. 우리가 지키는 동안, 여전히 이야기를 품고 있을 거예요.”


4. 약속

그날 밤, 리아는 홀로 창가에 앉아 바람을 들었다. 바람은 여전히 간헐적으로 숫자를 속삭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부드러운 멜로디였다.

리아는 펜을 들어 노트에 글을 남겼다.

“아빠,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저는 바람을 지킬게요.”

그리고 무전기를 켰다. “아빠, 약속해요. 저는 지구를 지키고, 아빠는 길을 찾아줘요. 그러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죠.”

엘리야의 목소리가 차분히 돌아왔다. “그래, 약속하마. 네가 남기는 이야기가 우리가 돌아갈 길이 될 거다.”


5. 무너지는 세계

며칠 뒤, 지구의 기후는 또다시 급격히 변했다.
사막화가 북쪽까지 번졌고, 남쪽 해안은 바닷물이 역류해 마을을 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르카 기지로 피신해 왔고, 기지는 더 이상 숨겨진 시설이 아니었다.

“우린 결정을 더 늦출 수 없어.” 류 박사가 외쳤다. “지금 당장 이주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갈 수 있는 사람보다 남아야 할 사람이 훨씬 많았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모두가 말문을 닫았다.


6. 우주의 불빛

그때, 노마드가 새로운 신호를 포착했다.
별빛의 강 끝에서 거대한 행성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푸른빛과 초록빛이 어우러진, 지구를 닮은 세계였다.

은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기다. 인류가 다시 뿌리내릴 곳.”

엘리야는 무전을 눌렀다. “리아, 우리 해냈다. 새로운 땅을 봤다. 이제 너희에게도 전할 수 있다. 희망은 현실이 된다.”

지상에서 리아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의 눈물이 아니라, 약속이 지켜지고 있다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7. 남는 자들

아르카 기지의 사람들은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일부는 이주선을 타고 떠나고, 일부는 지구에 남기로 했다. 남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지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가는 일이기도 했다.

리아는 남기로 했다.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아빠가 길을 찾으면, 저는 그 길을 여전히 지구에서 불러줄 거예요. 그래야 다시 이어지죠.”


8. 마지막 인사

노마드와 아르카 기지 사이의 무전은 마지막으로 연결되었다.

“리아, 사랑한다.” 엘리야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저도 사랑해요, 아빠.” 리아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미소가 묻어 있었다. “우린 떨어져 있어도 같은 노래 안에 있어요.”

“맞다. 그 노래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할 거다.”


9. 떠남과 남음

이주선이 지구를 떠날 준비를 했다. 수많은 눈빛이 창문 너머로 지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희망이 동시에 스며 있었다.

노마드는 별빛의 길을 따라 신세계로 향했다. 엘리야와 은하는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뒤돌아보면 끝없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지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여전히 리아가 있었다. 그녀의 노트는 바람과 불빛, 바다와 꽃,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10. 남는 약속

마지막 무전이 울렸다.

“아빠, 꼭 돌아와요.”

“그래. 돌아가겠다. 네가 지키는 이야기가 있는 한, 우린 다시 만난다.”

무전은 끊겼지만, 약속은 남았다.
떠나는 자들의 발걸음과, 남는 자들의 숨결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지만, 같은 노래로 이어져 있었다.

지구의 황혼 속에도, 별빛의 새벽 속에도, 약속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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