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빛의 무대, 어둠의 그림자
고척돔의 천장은 눈부신 조명과 수천 명의 환호로 가득 차 있었다. 무대 위 다섯 명의 소녀들은 완벽하게 안무를 맞추며 노래를 이어갔다. 세레니티(Serenity), 지금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를 휩쓰는 케이팝 걸그룹이었다. 리더 지아, 메인보컬 아린, 래퍼 미카, 메인댄서 수현, 막내 유나. 다섯 멤버가 호흡을 맞추어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터뜨리는 순간, 팬들의 환호는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폭발했다.
그들의 무대는 빛이었다. 반짝이는 LED 스크린, 환호 속에서 흔들리는 응원봉,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젊은 여인들. 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무대 뒤편에, 전혀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공연이 끝나고, 멤버들은 무대 뒤로 들어왔다. 숨이 가쁘게 오르내렸고, 화려한 미소가 지워진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러나 땀방울보다 무거운 것이 어깨를 짓눌렀다.
“오늘은 좀 이상했어.” 아린이 목을 누르며 말했다. “노래할 때… 무대 뒤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어.”
“나도 느꼈어.” 미카가 무대를 떠나자마자 군데군데 어둡게 번져 있는 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어.”
리더 지아는 심각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단순한 아이돌 리더의 눈빛이 아니었다. 헌터의 눈이었다.
잠시 뒤, 무대 뒤편 출입구가 열리며 남자가 다급히 들어왔다. 도현. 겉으로는 단순한 매니저였지만, 사실은 가디언 본부에서 파견된 감시자이자 조력자였다.
“탐지 장치가 반응했어. 도심 근처, 바로 이곳에서 데몬의 흔적이 잡혔어.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린 거야. 준비해.”
순간 멤버들의 표정은 아이돌이 아니라 전사가 되었다. 지아는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늘도 무대는 계속되는 거야. 하지만 무대 뒤에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고척돔 외곽, 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어둡고 한산한 거리에 균열이 생겼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차가운 바람이 갈라진 틈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곧이어 그림자 같은 형체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그리고 인간의 절망을 빨아들이는 괴물들. 데몬이었다.
세레니티 멤버들은 대기실 한쪽에 숨겨진 공간에서 각자 장비를 꺼냈다. 그들의 전투복은 아이돌 의상보다 단순했지만, 몸에 맞춰 설계된 강화복은 에너지 파동을 증폭시켰다.
“빛의 검, 활성화.” 지아의 손에 은빛 검이 나타났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쥐던 손이, 이제는 검을 단단히 붙잡았다.
“음파 장치, 가동.” 아린의 목소리에 작은 마이크 모양 장치가 반짝이며, 그녀의 목소리를 증폭시킬 준비를 했다.
미카는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어둠은 내 무대지.”
수현은 팔목에 방패 장치를 활성화시키며 말했다. “나부터 앞장설게.”
유나는 작은 빛의 구슬을 꺼내 손에 쥐었다. 치유와 강화의 힘이 담긴 그것은 팀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균열 속에서 튀어나온 데몬들이 포효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섯 명의 소녀들이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무대 위에서 쌓은 호흡이 전투에서도 이어졌다.
지아의 검이 데몬의 몸통을 갈랐고, 아린의 목소리가 음파 충격파로 날아가며 적들을 뒤로 밀어냈다. 미카는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정확히 심장을 찔렀고, 수현은 방패로 날아드는 발톱을 튕겨냈다. 유나는 쓰러진 동료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다들 집중해!” 지아의 외침에 멤버들이 다시 호흡을 맞췄다.
싸움은 치열했지만 짧았다. 마지막 데몬이 산산조각나며 연기처럼 흩어지자, 균열은 서서히 닫혔다. 남은 것은 고요와, 약간의 피로뿐.
“오늘은 좀 많았네.” 미카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점점 강해지고 있어.” 수현이 방패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도현이 무전기를 정리하며 다가왔다. “본부 분석팀 말로는, 최근 들어 봉인이 약해지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와. 단순한 우연이 아니야. 더 큰 놈이 오고 있어.”
지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라그나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곧 답이었다.
다음 날, 세레니티는 다시 평범한 아이돌처럼 방송국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팬들의 선물, 제작진의 카메라, 셀카와 SNS. 그 모든 것이 겉모습을 완벽히 가려주었다. 하지만 멤버들의 눈빛은 공연보다 더 무거웠다.
“우리가 계속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아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낮에는 무대, 밤에는 전투… 몸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우린 선택받았어.” 지아가 단호히 말했다. “이건 단순한 직업이 아니야. 우리가 아이돌이 된 것도, 이 힘을 가진 것도 모두 이유가 있어. 무대와 전투는 같은 거야.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빛을 만들고, 어둠을 몰아내는 것.”
유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팬들은 모르잖아.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 혹시라도 알게 되면… 그들이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지아는 미소를 지었다. “팬들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몰라도 돼. 우리가 하는 건 영웅의 쇼가 아니야. 그저, 무대와 삶을 지켜내는 거지.”
밤이 되자, 서울의 다른 구역에서 또다시 균열이 열렸다. 이번에는 더 거대하고, 더 많은 데몬이 쏟아져 나왔다. 세레니티는 다시 출동했다. 그러나 이번 싸움은 이전과 달랐다. 데몬들 사이에서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거대한 그림자가 균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눈동자, 날개를 접은 채 불길처럼 피어오르는 실루엣.
“하… 인간 따위가 아직도 발버둥치고 있군.”
그 목소리에 멤버들은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을 느꼈다. 라그나르의 전조였다. 아직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의식이 이미 균열 너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곧, 무대는 나의 것이 될 것이다. 환호와 절망, 모든 감정은 나의 먹이가 된다.”
지아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아. 우리의 무대는… 사람들의 빛을 위한 거야!”
멤버들이 다시금 전투 태세를 취하는 순간, 균열이 요동치며 도심 전체에 검은 파동이 퍼졌다. 불빛이 깜빡이며 꺼지고, 사람들은 쓰러졌다. 도현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울렸다.
“지아, 이건 단순한 전투가 아니야. 봉인이 흔들리고 있어. 더 큰 전쟁이 시작된다.”
라그나르의 웃음소리가 도심 전체를 울렸다.
“즐겨라, 아이돌 전사들이여. 너희의 노래가 끝나는 순간, 세상은 내 것이다.”
지아는 멤버들을 바라봤다.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동시에 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무대 위에서처럼, 이제 그들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싸워야 했다. 팬들에게 빛을 주는 아이돌이자, 어둠과 맞서는 헌터로서.
그리고, 진짜 이야기는 이제 막 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