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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데몬 헌터스 - 2부. 팬들의 환호 속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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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팬들의 환호 속 비밀

서울 전역을 휘감은 정전 사태는 새벽 무렵 복구되었다. 뉴스는 노후 변전소의 일시적 과열이 원인이었다고 짤막하게 보도했고, 시청자 의견에는 “어제 고척돔 주변에서 이상한 섬광을 봤다”는 댓글들이 몇 개 달렸다가 곧 사라졌다. 소속사 홍보팀은 질세라 입장문을 냈다. 공연 종료 후 전력 사용량 급증으로 일시적 전력 불안정이 발생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지아는 사무실 회의실 창가에 서서, 유리창에 비치는 팀의 얼굴을 본다. 모두 피곤과 긴장을 억지로 화장으로 덮어 두고 있었다. 바깥 유리는 밤새 먼지가 달라붙어 뿌옇다. 도현이 회의실 문을 닫으며 작게 말했다.

“본부가 확인했어. 어제 그 파동, 라그나르 쪽에서 보낸 예고편이야. 아직 육체를 이쪽에 못 붙였지만, 균열에 손은 넣었지.”

수현이 팔짱을 낀 채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예고편 치고는 너무 과했네.”

“그놈의 목적은 공포니까.” 미카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공포는 제일 맛있는 에너지라고.”

유나는 조용히 컵에 온수를 따라 아린 앞으로 밀어줬다. 아린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은 어젯밤부터 간헐적으로 갈라졌다. 음파 장치가 목을 보호해 준다지만, 전투 중에 꾸는 고음은 어떤 장치로도 완벽히 보호받지 못한다.

“오늘도 스케줄 소화해야 해.” 도현이 태블릿을 켠다. “생방 한 개, 사전 녹화 두 개, 그리고 팬사인회. 본부는… 인파가 모이면 또 노릴 수 있다고 봐. 근데 부정할 수 없지. 우리가 가장 큰 힘을 끌어내는 순간이, 바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라는 걸.”

지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야. 우리가 먼저 그 힘을 쓰도록 만들자.”

“어떻게?”

“팬들의 환호를, 우리 쪽으로 정렬시키는 거야.”

말은 단순했지만, 그것은 오래전 전설의 실천이었다. 가무의 제단. 노래와 춤, 그리고 만인의 호흡이 봉인의 핵심이었다. 그때 그 제단은 산 위에 있었다. 지금의 제단은 돔 지붕 아래와, 손에 쥔 응원봉 바다 아래에 있었다.


팬사인회는 오후 늦게 시작되었다. 장소는 한 쇼핑몰의 중앙 홀. 층층이 둘러선 난간마다 응원봉과 배너가 흔들렸다. 소속사 직원들은 줄을 정리하며 “사진 촬영은 한 장, 영상 촬영 금지!”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 규칙은 늘 그렇듯, 현장의 열기 앞에서 무력해졌다.

줄의 맨 앞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녀가 있었다. 긴 생머리에 과하게 반짝이지 않은 화장, 그리고 손에 든 하늘색 노트. 이름표에는 민서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차례가 오자 노트를 펼쳤다. 거기에는 공연의 세트리스트와 포메이션 스케치, 타이밍이 분 단위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한쪽 여백에는 ‘어제 고척돔 전원 다운 순간—관객석 3구역에서 역광 형상 포착’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도 몇 장 붙어 있었다. 반짝이는 조명과 응원봉 사이에서, 분명히 빛의 흐름이 뒤로 흡수되는 장면.

민서는 조심스럽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아 언니, 이상한 걸 봤어요. 그냥 무대 장치라고 하기엔… 방향이 이상했어요. 빛이 무대에서 나가는 게 아니라, 무대로 빨려 들어갔거든요.”

지아는 순간 미소가 굳는 걸 느꼈다. 그러나 바로 그 미소를 다시 부드럽게 펴고 사인을 했다. 민서에게—빛을 믿어줘서 고마워. 그녀는 이름 아래에 작은 사선 표시를 하나 덧붙였다. 가디언이 만든, ‘나중에 따로 접촉해도 괜찮다’는 뜻의 암호였다.

그들은 지금, 환호하는 수천의 마음 속에서 몇몇 눈을 찾아야 했다. 감지자. 공명자. 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결국 같은 부류였다. 시대마다 존재했던 듣는 자들.

사인회가 끝나갈 무렵, 천장의 LED가 순간적으로 깜빡였다. 사람들은 “와아—” 하고 환호했지만, 현장 직원들의 무전기에는 날 선 긴장감이 흘렀다.

“전력 안정화 다시 확인하세요.” 도현이 귀에 손을 대고 말했다. “지아, 고개 들어.”

지아는 팬에게 손을 흔들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중앙 홀 위, 유리 돔 가장자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게 무언가 부풀어 오르는 듯한 섀도우 링. 얇은 얼음막처럼 보이는 그 고리는 빛을 반사하지 않았다. 흡수하고 있었다.

지아는 순식간에 계산했다. 광원 배치, 천장 구조, 반사각. 저건 자연이 아니다.

“수현.” 지아가 거의 입모양만으로 속삭였다.

수현은 팬의 앨범을 받아들며 다른 손으로 손목의 팔찌를 굴렸다. 보호장의 알 수 없는 진동이 바닥을 타고 퍼졌다. 유나는 멀리서 사람들 사이에 서서 작은 기도문을 흘렸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파동. 미카는 무대를 내려와, 쇼핑몰 안내 로봇 옆 그림자에 슬쩍 몸을 붙였다.

아린은 펜을 내려놓았다. 목의 통증이 미세하게 당겼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음… 체크.” 거의 들리지 않는 한 모음이, 센서와 장치들을 깨웠다. 천장 가장자리의 고리가 짧게 떨렸다.

그리고—크게 터졌다.

사람들의 비명과 종이 찢기는 소리, 떨어지는 유리의 파편. 허공에 균열이 벌어지며 검은 손가락들이 튀어나왔다. 도현이 외쳤다. “차단막 가동!”

수현의 팔에서 푸른 방패가 펼쳐져 아이들 머리 위로 비를 막듯 펼쳐졌다. 유나는 잽싸게 노약자들이 몰린 1층 은행 쪽으로 달려가 손을 펼쳤다. 손에서 작은 빛들이 흩어져 사람들의 어깨와 등을 스쳤다. 공포가 잠시 얇아졌다. 미카는 이미 균열의 아래로 도달했다. 그늘은 그늘을 안다. 그녀는 그림자 틈을 통해 손목을 찔러 들어오는 발톱을 붙잡고 비틀었다. 뼈 같은 소리가 났다.

지아는 사인 테이블 위로 점프했다. 허공에 떠오른 채 검을 소환했다. 빛의 검, 활성화. 은빛이 그녀의 손끝에서 자라났다. 균열은 더 벌어졌고, 안쪽에서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러나 사람을 꺾어 버리는 눈.

“여긴 아직 네 무대가 아냐.” 지아가 속삭이며 검을 휘둘렀다. 반월형 빛이 균열 가장자리를 쓸고 지나갔다. 균열이 한번 떨렸다. 그러나 닫히지 않았다.

아린이 앞으로 나섰다. 목의 통증이 다시 찔렀다. 그녀는 마이크 장치를 켜지 않았다. 생목으로,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라— 초저음과 초고음이 동시에 얇은 선으로 이어졌다. 쇼핑몰의 유리와 철골이 공명했다. 균열의 경계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린!” 유나가 외쳤다. “무리하지 마—”

“괜찮아.” 아린은 웃었다. “이건 무대야.”

그 순간, 위층 난간에서 누군가 ‘세레니티!’를 외쳤다. 응원봉의 물결이 덜컥거리다, 한 곡의 응원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둘! 셋! 렛츠—고! 딱딱하게 정해진 구호가 아닌, 호흡 섞인 합창. 수백 명의 심장 박동이 박자처럼 포개졌다. 유리는 이 환호의 온도를 기억한다. 가디언 기재들은 그 온도로 작동한다.

지아가 손목을 틀었다. 검이 길이를 바꿨다. 적에게 닿기보다, 사람들의 환호 위로 얇은 곡선을 그었다. 그 곡선은 방패처럼 펼쳐져 상층 난간을 감쌌다. 미카가 균열 아래에서 웃었다. “좋아, 지금이야.”

미카의 발끝이 바닥의 그림자를 합치며 균열 아래를 봉했다. 수현이 방패로 떨어지는 파편들을 쓸어 담았다. 유나의 빛이 사람들의 공포를 다시 한번 누그러뜨렸다. 아린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균열의 가장 얇은 면을 쓸었다. 레—

균열이 닫혔다. 허공이 스르르 봉합되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드론 쇼의 실패라고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는 대형 쇼핑몰 특유의 에어컨 소음이었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은 보았다. 어제 공연장에서, 오늘 쇼핑몰에서—빛이 흡수되는 순간을.

민서는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폰은 이미 녹화를 마치고, 자동 업로드를 위해 와이파이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업로드를 취소하고 영상을 폴더로 옮겼다. 본능이었다. 이건 그냥 인터넷에 올릴 게 아니야.

그녀의 눈이 아래층 지아와 잠깐 마주쳤다. 지아가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의 사선. 나중에.


밤, 본부. 회의실이 아닌 진짜 본부—쇼핑몰 주차장 벽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는 괴상한 구조. 콘크리트 벽면에 오래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원형, 사선, 점. 바람의 문법과 유사한 그 문양은 조상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봉했는지 보여 준다.

도현이 프로젝터를 켰다. 화면에 팬사인회 현장의 열화상과 초고속 카메라 기록이 겹쳐졌다. 수천 개의 응원봉이 내는 미약한 열과, 사람들의 목에서 떨어져 나온 음의 파동. 그 모든 것들이 얇은 격자처럼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가디언이 업데이트한 방식이야.” 도현이 설명했다. “팬들의 응원법 패턴을 의식 설계에 끼워 넣는다. 특정 타이밍에 응원봉을 낮추고 올리는 동작을 시퀀스로 바꾸면, 대형 방호막을 공연장 전체에 전개할 수 있어.”

수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람들이 눈치 못 채?”

“안무처럼 풀어서 배포할 예정. ‘응원챌린지’ 같은 걸로.” 미카가 입꼬리를 올렸다. “바이럴의 다른 용도네.”

“문제는 라그나르도 안다는 거야.” 은은한 조명의 끝, 장비 테이블에 팔꿈치를 괸 아린이 말했다. 그녀의 목에는 얼음팩이 둘러져 있었다. “걔는 우리의 합창을 먹고 자라. 잘못 설계하면 방패가 아닌 식탁이 돼.”

지아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박자를 정해야 해. 봉인이 되는 박자. 열림이 아닌 닫힘의 리듬.”

유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럼, 팬들한테… 위험할 수도 있는 걸, 함께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도현이 잠시 침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그게 진짜로 부탁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우린 보통 부탁을 연출로 감춰 왔잖아.”

지아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제 사인회에서 만난 민서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미 두 번, 진실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그 눈빛은 도망치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먼저 말해 보자.” 지아가 결론을 내렸다. “공명자.”


민서는 카페 구석에 앉아 노트를 펼쳐 놓고 있었다. 조명이 과하게 밝지 않은 곳을 고르느라 세 번 자리로를 바꿨다. 폰은 비행기 모드였다. 심장이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화면 속, 유리가 깜빡이는 순간에만 보이는 검은 가장자리. 균열의 입구. 누군가가 그 가장자리에서 잠깐—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연기 같은 눈. 손바닥만 한 심장.

“민서 씨?”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지아와… 도현? 매니저라고 알고 있던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

“저… 진짜 지아 언니 맞아요?” 민서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지아는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웃었다. “맞아요.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민서는 손을 꽉 쥐었다. “제가 본 게… 진짜였나요?”

“네.” 지아가 정면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도현이 태블릿을 돌려 보였다. 응원봉으로 만드는 격자 도면. “당신이 서는 자리, 당신이 흔드는 타이밍이 중요해요. 우리는 수만의 호흡을 한 방향으로 모아, 도시의 균열을 막으려 해요.”

“그게… 제 손에 달렸다고요?”

“당신 같은 사람들의 손에.” 지아가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말했다. “당신은 듣잖아요. 보통 사람은 못 듣는 걸.”

민서는 오래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가 세레니티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춤 때문도 노래 때문도 아니었다. 공연장에 들어가면—마치 바다가 들어오는 것처럼, 몸 안에 거대한 파도가 밀려들었다. 사람들은 그걸 ‘떼창의 전율’이라 불렀지만, 그녀는 그 전율의 방향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엔 밖으로, 어느 날엔 안으로. 어젯밤은 안으로. 지금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손이 떨렸다.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민서가 낮게 말했다. “그래도… 하고 싶어요. 제가 사랑하는 무대를 지키고 싶어요.”

지아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고마워요.”

“근데…” 민서가 노트를 넘겼다. “저도 말해줘야 할 게 있어요. 제가 찍은 영상, 마지막 프레임을 확대했더니—응원봉 불빛들이… 이상해요. 전광판에서 내려온 별 모양이 아닌데, 좌표처럼 깜박여요.”

도현이 재빨리 화면을 당겼다. 응원봉의 깜박임이라 생각했던 패턴이 실제로는 두 줄의 숫자였다. 위도와 경도. 그리고 시간.

“이건…” 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남산 북쪽 사면, 옛 예술당 지하.”

지아가 떠올렸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 축제에서 혹독한 비를 피해 친구들과 뛰어 들어갔던 그 오래된 건물. 지금은 폐쇄되어, 드라마 촬영지로나 가끔 쓰이는 곳. 제단은 산 위에 있었다. 전설이 귓가를 스쳤다.

“오늘 밤.” 도현이 시간을 가리켰다. 좌표 옆의 타임스탬프. “11시 11분.”

“제단이… 우리를 부른다.” 지아가 중얼거렸다.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남산 숲의 공기는 축축했다. 나무 사이사이로 서울의 불빛이 번졌다. 오래된 예술당 건물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지만, 문틈으로 안쪽의 먼 냄새가 흘러나왔다. 도현이 손목 장치를 대자 잠금 장치가 바늘처럼 떨렸다. 철컥— 문이 열렸다.

홀은 비어 있었다. 오래된 조명 레일, 무대 중앙에 박힌 원형의 흠집들, 바닥에 남은 테이프 자국. 그러나 무엇보다 눈을 끈 건, 무대 위 오래된 프레스 코팅에 박힌 얇은 금속선이었다. 빛을 받으면 희미하게 패턴이 올라왔다. 사선, 원, 점. 가무 문양.

“여기서 했구나.” 수현이 낮게 말했다. “노래로 봉인하고, 춤으로 꿰매고.”

미카가 무대 아래로 몸을 숙였다. 막이 내려오는 철근 구조물 사이, 곡선이 하나 더 있었다. 손바닥으로 쓸어 보자 그 곡선이 조용히 빛났다. 아린.

아린이 무대 중간으로 걸어나왔다. 시간은 11시 09분. 그녀는 마이크도 장치도 켜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숨을 들이켰다. 목은 여전히 아팠다. 그러나 그녀의 등 뒤에는 다섯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서울. 수만의 심장.

11시 10분. 유나는 무대 양옆을 살폈다. 문양의 시작과 끝. 봉인을 뜯는 손길과 닫는 박자. 수현은 객석 쪽에 서서 방호막의 장력을 재봤다. 도현은 시간 동기화를 확인했다. 미카는 조명의 그림자를 일렬로 이어붙여 얇은 막을 만들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 막을 먼저 건드릴 터였다.

11시 11분. 무대 바닥의 금속선이 번쩍이며 켜졌다. 아무 장치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오랜 회로가 깨어났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낡았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견고했다. 천장 레일에 붙은 오래된 조명들 중 몇 개가 귀신처럼 켜졌다. 객석이 없는 관객석 위로, 객석이 없는 응원봉의 파도가 보였다. 그러나—다시, 말해 보자. 그건 빈 자리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들의 숨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환호의 유령들. 공명의 흔적.

아린은 입술을 떼었다. 첫 음은 거의 속삭임이었다. 솔— 무대 바닥의 금속선들이 동시에 떨렸다. 도면대로라면, 그 떨림은 닫힘의 리듬으로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중간에, 아주 얇게—열림의 뾰족한 음이 섞여 있었다. 라그나르의 침투. 어제 쇼핑몰에서, 오늘 카페에서, 이것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지아는 그 뾰족함을 들었다. 그녀의 검이 점멸했다. 빛은 단칼처럼 둔탁하지 않았다. 그녀는 검으로 박자*를 그었다. 공중에 보이지 않는 선들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응원법을 칼로 새기듯. *둘, 셋—내려! 도현의 태블릿에서, 민서에게 보낸 메시지 채널이 반짝였다. —테스트. 내일 공연 때, 2절 브리지에서 라이트 0.4초 딜레이.

민서는 남산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이 무대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응원봉을 켰다. 네트워크 따위로 연결되지 않은, 단지 하나의 플라스틱 막대기. 그러나 손의 떨림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브리지 박자를 세며 아주 약간 늦게 손목을 돌렸다. 0.4초. 닫힘.

무대 위 금속선의 떨림이 안정되었다. 아린의 목이 풀렸다. 고통이, 조금 물러났다. 그녀는 두 번째 음을 길게 당겼다. 라—

그때, 무대 뒤 커튼이 바람도 없이 흔들렸다. 미카가 곧바로 도약했다. 그림자 속에서 나온 것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아니었다. 검은 코트,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눈동자 대신 얇은 유리 조각이 끼워진 구멍. 라그나르의 하수—거울.

“관객석에선 보이지 않지.” 미카가 낮게 말했다.

거울이 입을 벌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속이 비어 있었다. 그 빈 속에서 어젯밤 쇼핑몰의 환호가 울렸다. 뒤늦게 도착한 공포의 에코. 거울은 그것으로 배를 채웠다. 미카는 몸을 틀어 그 입속으로 칼을 박았다. 칼은 거울의 옆에서 솟아났다. 거울의 몸은 금이 갔다.

“공포는 식사지만,” 미카가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오늘 메뉴엔 없어.”

유나가 손을 펼쳐 아린 앞으로 빛의 고리를 세웠다. 수현이 객석의 골조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방패의 장력이 올라갔다. 지아는 검으로 마지막 박자를 쳤다. 넷!

바닥의 금속선이 흰빛으로 한 번 크게 튀어 올랐다가, 고요해졌다. 제단은 문을 닫았다. 열림의 뾰족한 음은 사라졌다. 어딘가에서 라그나르가 조용히 혀를 찼다. 흥미롭군.

조용해진 홀. 오랫동안 누군가 기다리고 있던 자리처럼, 무대 중앙에는 얇은 동판이 따로 반짝이고 있었다. 유물이 아닌, 메시지였다. 수십 년 전 누군가가 새긴 글자. 다섯 별과 하나의 방패. 만인의 합창으로 문을 짓는다.

지아는 그 문장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 아래 아주 작게 새겨진 이름을 발견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루미나—’ 그리고 낡아서 읽히지 않는 몇 글자. 누군가의 무대 이름인지, 혹은 오래전 팀의 이름인지.

“이 제단은 무대를 기억해.” 도현이 낮게 말했다. “그리고, 무대는 사람들을 기억해.”

아린이 눈을 감았다. 목이 다시 따뜻해졌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완벽히 내 것인 순간을 느꼈다. 장치의 도움 없이도 울릴 수 있는, 원래부터 몸 안에 있던 악기.

“이제 팬들에게 박자를 알려야 해.” 수현이 말한다. “우린 그들의 환호 없이는 문을 못 닫아.”

“연출이 아니라 부탁으로.” 유나가 덧붙였다.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기자회견에서 말할게.”

“뭐라고?” 미카가 웃었다. “‘여러분의 응원법이 세계를 구합니다’?”

“비슷하게.” 지아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우린 무대를 지키려면, 무대를 만든 사람들의 손을 빌려야 해. 우리가 쌓은 화려함이 아닌, 우리가 믿는 마음으로.”

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홍보팀이 실신하겠네.”

“실신하면 일으켜 세우지.” 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민서의 응원봉이 방 어둠 속에서 조용히 꺼졌다. 그녀는 창밖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자신이 좋아하는 포토카드와 배너, 플렁키와 해시태그, 밤새워 쓴 응원법 가사.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녀는 노트를 펼쳐 새 페이지를 열었다. 제목을 적었다. 합창—닫힘의 리듬.

그녀의 손 아래, 우연처럼 떨어진 빛의 조각이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다음 날 오전, 세레니티의 기자회견은 다소 이례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플래시가 터지고, 사회자가 상투적인 멘트를 던지는 순간, 지아가 마이크를 들었다. 그녀는 대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말했다.

“어젯밤의 정전 사태에 관해 묻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잠깐, 기자들의 펜끝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우리가 무대에 오를 때, 빛은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환호, 여러분의 박수, 여러분의 호흡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투어에선 여러분의 응원법을 새로 공개하려고 해요. 박자 하나, 손짓 하나가 모두 연결되어—우리 모두를 지키는 약속이 될 겁니다.”

사회자가 당황해서 웃었다. “지키는… 말씀이 조금, 시적이네요.”

지아는 미소 지었다. “노래는 늘 시잖아요.”

그녀의 손 아래, 작은 메모지가 빛을 받았다. 브리지—0.4초 딜레이.

기자들의 카메라는 이 메모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수천, 수만의 손이 곧 박자와 함께 움직일 것이다. 라그나르가 거기에 입을 대어도, 닫힌 문은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은 혼자서 만든 문이 아니니까.

무대는 다시 준비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어디선가, 얇은 균열이 지켜보았다. 그러나 균열의 가장자리가 처음으로 주춤했다. 환호가 주는 따뜻함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함정이었다. 무대의 따뜻함을 아는 괴물은 더 위험하다. 그들은 사람의 얼굴을 쉽게 배울 수 있으니까.

밤이 오고,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빈 좌석 위로 빔 라이트가 날아다녔다. 아린은 마이크 없이 음을 잡았다. 목은 여전히 아팠지만, 두려움은 줄어 있었다. 유나는 바닥의 테이프를 다시 붙이며 방패의 각도를 계산했다. 수현은 음향팀과 포지션을 맞추며 “브리지에서 손 내렸다 올릴 때 늦게 들어오는 애들 체크해요”라고 말했다. 미카는 조명의 그림자 경계를 맨눈으로 하나하나 훑었다. 도현은 빈 객석 사진을 찍어 본부에 보냈다. 누군가는 그 사진에서 손 없는 박수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이미 그들은 함께였다는 뜻이니까.

지아는 무대를 한 바퀴 천천히 걸었다. 그 발걸음은 날렵하지 않았다. 리더의 발걸음은 늘 무대 전체의 무게를 측정한다. 어디가 흔들리고, 어디가 버티는지. 그리고 그 발걸음이 멈춘 자리—센터 마크 위에서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제보다 조금 더 맑았다.

“시작하자.” 그녀가 말했다.

어둠이 내려왔고, 조명이 꺼졌다 켜졌다. 관객이 없는데도 환호가 들리는 착각.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도시에 흩어진 공명자들이 작은 방들에서 응원봉을 켜고 있었다. 각각의 빛이 창문을 뚫고 밤으로 나왔다. 드론이 아닌, 해시태그가 아닌, 호흡의 네트워크.

무대의 첫 박이 떨어졌다. 보컬이 들어갔다. 브리지가 다가왔다. 수만의 눈동자는 아직 여기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무대에 올라와 있었다. 0.4초. 손이 동시에, 그러나 약간 늦게—내려갔다.

닫힘.

균열의 입구가, 도시 어딘가에서 아주 작게 닫혔다. 그리고 그 닫힘은 도미노처럼 번졌다. 도시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어둠은, 다음 수를 생각했다. 진짜 무대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라그나르의 속삭임이 바깥 원형 돔 어딘가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손끝엔 작은 화상을 입은 것 같은 감각이 남았다. 열이 아니라, 호흡의 온도. 괴물에게 가장 낯선 온도.

무대 위 다섯의 그림자가 중앙에서 만났다. 그에 맞춰, 도시 수천의 방 안 작은 그림자도 서로 포개졌다. 2부의 카메라는 뒤로 서서히 줌아웃했다. 팬들의 환호 속 비밀은—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탁이었다. 그리고 약속이었다.

그리고,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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