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균열의 도시
서울의 밤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듯 보였다. 강남대로는 여전히 불빛으로 가득했고, 홍대의 클럽에서는 음악이 터져 나왔으며, 한강 다리 위에서는 차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 어딘가에 균열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틈, 공기의 흐름에 섞여 드러나는 어둠의 입구.
가디언 본부의 지도 모니터 위에 붉은 점들이 번져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편처럼 흩어진 몇 개였던 점이, 오늘은 수십 개로 늘어났다. 서울 전역이 서서히 감염되듯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도현은 이마를 짚었다.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야. 도시는 지금 서서히 라그나르에게 잠식당하고 있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균열이 퍼지고 있잖아.”
지아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고척돔, 잠실 경기장, 남산 예술당. 어제부터 계속 등장하는 패턴이 있었다. “무대와 닮은 장소들이야. 수천이 모여 호흡을 맞추는 자리. 라그나르는 공연장을 흡수해 자신의 제단으로 바꾸려는 거야.”
“맞아.” 아린이 속삭였다. 목의 통증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그녀의 귀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나는 소리를 듣고 있어. 어제부터, 도시 전체가 음을 내고 있어. 불협화음이야. 균열이 확장될수록 그 불협화음은 커지고 있어. 곧 모든 소리가 라그나르의 심장 박동처럼 될 거야.”
유나는 손을 모았다. “그럼, 우리가 막지 못하면… 서울 전체가 무대가 되는 거네. 그리고 그 무대는 사람들의 공포로 채워지는.”
미카가 날카롭게 웃었다. “그럼 지구 최대 규모의 공포 콘서트네. 티켓 값은 영혼 하나씩?”
수현이 그녀의 농담을 무시하며 무전을 조정했다. “본부 분석에 따르면, 가장 불안정한 지역은 을지로 지하상가야. 낮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밤에는 텅 비는 공간. 비워진 울림통이 균열과 공명하고 있어.”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목표는 그곳이야. 균열이 더 퍼지기 전에, 봉인을 재개해야 한다.”
을지로의 심장
밤 열한 시, 을지로 지하상가는 적막했다. 낮에는 전등과 사람들로 붐볐던 상점들이 모두 셔터를 내렸고, 불 꺼진 통로에는 환풍기 소리만 메아리쳤다.
세레니티 멤버들은 지하상가 한복판, 분수대가 있던 자리 앞에 모였다. 유난히 차가운 공기가 돌았다.
“여기야.” 아린이 귓속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지만, 그 떨림은 공명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자리… 마치 거대한 드럼통 같아. 소리를 울려서 어둠을 키우고 있어.”
지아가 검을 꺼냈다. 은빛 검은 상가의 네온 간판 잔해를 반사하며 가늘게 빛났다. “곧 열릴 거야.”
순간, 바닥의 타일이 갈라졌다. 검은 틈이 꿈틀거리며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균열이었다. 틈새에서 데몬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더 많고, 더 거대했다. 그들의 몸은 도시의 파편처럼 변형되어 있었다. 지하철 표지판을 갑옷처럼 두른 괴물, 끊어진 전선이 꼬리를 이룬 괴물, 사람들의 음성을 흉내 내며 웃는 괴물.
“여긴 도시 자체가 데몬화되고 있어.” 수현이 방패를 펼쳤다.
“그럼 도시의 리듬으로 막아야지.” 아린이 숨을 고르고 목을 풀었다.
전투의 합창
데몬 무리가 동시에 포효하며 돌진했다.
지아가 검을 휘둘러 첫 줄을 갈랐다. 빛의 검은 괴물들의 몸을 관통하며 균열의 가장자리에 흰 흔적을 남겼다.
수현은 방패를 높이 들어 데몬들의 돌진을 막아내고, 방패를 휘둘러 반격했다. 충돌음이 터져 나가자 지하상가 천장이 흔들렸다.
미카는 그림자 사이를 오가며 단번에 심장을 찔렀다. 그녀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안무처럼 날카로웠다.
유나는 쓰러진 시민을 발견했다. 균열이 열리며 흡수된 통로에서 나온, 미처 대피하지 못한 상인 한 명. 그녀는 즉시 빛의 고리를 펼쳐 상인을 감싸 안았다. 상인의 두려움은 빛 속에서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린. 그녀는 고개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장치도, 마이크도 없이, 목소리 하나로.
라—라—라—
그 순간, 상가 전체가 울렸다. 유리 파편이 공명했고, 금속 파이프가 함께 떨렸다. 데몬들은 귀를 막듯 괴성을 질렀다.
“좋아, 바로 이거야!” 미카가 웃으며 데몬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아린의 목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갈라졌고, 숨이 막히듯 끊겼다.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아린!” 지아가 외쳤다.
유나는 곧장 달려와 손을 댔다. 빛이 아린의 목을 감싸며 통증을 누그러뜨렸다. 아린은 거친 숨을 고르며 속삭였다. “아직… 안 끝났어.”
균열의 심장
전투는 격렬했지만, 균열은 닫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지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악기로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민서가 나타났다. 어제 사인회에서 지아와 마주쳤던 소녀. 그녀는 지하상가 입구에서 응원봉을 흔들고 있었다.
“지아 언니!” 민서가 소리쳤다. “제가 해볼게요! 어제 알려주신 박자!”
민서의 응원봉이 0.4초 늦게 흔들렸다. 단 하나의 박자 차이. 그러나 그것은 공명을 바꿨다. 데몬들의 포효가 순간적으로 끊기며, 균열의 틈새가 수축했다.
“됐어!” 도현이 무전으로 외쳤다. “민서 같은 공명자가 있어야 균열을 닫을 수 있어!”
지아는 검을 높이 들었다. “모두, 힘을 합쳐!”
다섯 멤버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갔다. 지아의 검, 아린의 목소리, 미카의 그림자, 수현의 방패, 유나의 빛. 그리고 민서의 응원봉.
그 순간, 지하상가 전체가 거대한 합창장이 되었다. 균열은 비명을 지르듯 떨리다가, 결국 닫혔다. 데몬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균열 뒤의 속삭임
적막이 찾아왔다.
“끝난 건가…?” 수현이 방패를 거두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균열이 사라진 자리에서 낮고 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밌군. 도시의 호흡을 내 편으로 만들 줄 알았는데… 너희가 먼저 알아챘구나.”
그 목소리는 라그나르였다.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의식은 이미 도시에 침투해 있었다.
“계속 노래해라, 춤춰라, 아이돌 전사들이여. 너희의 무대는 곧 나의 제단이 될 테니.”
지아는 이를 악물었다. “우린 무대를 지키기 위해 노래하고 춤추는 거야. 절대 네 제단 따위로 만들지 않아.”
라그나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럼, 도시 전체를 무대로 시험해 보자.”
도시는 균열이 된다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지도 모니터 위 붉은 점들이 동시에 번쩍였다. 을지로뿐만 아니라 홍대, 명동, 강남, 여의도, 심지어 한강 다리 위까지. 서울 전역에서 균열이 동시에 열리려 하고 있었다.
도현이 숨을 삼켰다. “라그나르가 도시 전체를 악기로 쓰려는 거야. 이건 단순한 전투가 아니야. 전쟁이야.”
지아는 검을 다시 쥐었다. 얼굴은 지쳐 있었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준비해야 해. 도시 전체를 무대로 삼을 각오로.”
아린은 갈라진 목소리로 미소를 지었다. “우리 팬들이 있다면… 가능해.”
미카가 칼을 닦으며 말했다. “좋아. 이제 진짜 쇼가 시작되는군.”
수현은 방패를 다시 세웠다. “그럼, 도시는 우리의 콘서트장이 된다.”
유나는 손을 모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의 가사가 된다.”
민서는 눈부신 눈빛으로 다섯 멤버를 바라봤다. “저도 함께할게요. 팬으로서, 공명자로서.”
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도시의 균열은 우리가 막는다. 라그나르가 진짜로 무대를 원한다면—그 무대는 우리가 주인공인 무대가 될 거야.”
도시의 불빛이 깜빡였다.
서울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무대이자 전쟁터였다.
그리고, 세레니티의 진짜 공연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