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라그나르의 속삭임
서울은 여전히 화려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지만, 그 불빛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협화음이 스며 있었다. 지하철 터널 벽 틈새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오래된 건물 창문은 이유 없이 갈라졌다. 거리는 평소처럼 사람들로 붐볐지만, 도현의 모니터에 비친 지도는 서울을 거대한 악보처럼 물들이고 있었다. 붉은 점들이 하나둘 모여, 음표처럼 배열을 이루고 있었다.
“라그나르가 도시 전체를 오선지 삼아 연주하려 하고 있어.” 도현은 낮게 말했다.
지아는 창문 밖 어두운 하늘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는 단순한 아이돌 리더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팬 앞에서 웃음을 지으며 무대를 이끄는 사람인 동시에, 도시를 지키는 전사였다. “라그나르가 진짜로 무대를 원한다면, 그 무대는 우리에게도 함정이 될 거야.”
아린은 목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아직도 노래할 때마다 갈라지는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귀는 어둠 속 작은 파동까지 듣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공격하는 게 아니야. 우리를 흔들고 있어. 균열 속에서 속삭이고, 마음 속 두려움을 파고들어.”
수현은 방패를 옆에 세워두고 턱을 괴었다. “속삭임이란 건 결국 약점이야.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 힘도 못 가지지.”
그러자 미카가 날카롭게 웃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문제는… 누가 먼저 무너지는가겠지.”
유나는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언제나 빛이 잔잔하게 맺혔다. “우린 약하지만, 함께면 괜찮아. 그게 우리가 무대에서 배운 거잖아.”
균열의 확산
그날 밤, 홍대 거리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인파로 붐볐다. 술집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클럽 안에서는 전자 음악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사람들 발밑, 보이지 않는 어둠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감지 반응 확인.” 도현이 무전을 통해 말했다. “홍대 클럽 지하 2층, 가장 강력한 균열이 열리고 있어.”
세레니티는 클럽을 향해 이동했다. 무대 의상이 아니라 검은 코트를 걸친 모습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무대 위보다 더 뜨거웠다.
클럽 지하 2층, 붉은 조명과 땀 냄새, 그리고 요란한 비트. 사람들은 춤추고 웃고 있었지만, 천장 틈새에서는 검은 기운이 이미 번지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그 균열이 서서히 벌어지고, 음악과 혼합되며 이상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놈이 음악을 먹고 있어.” 아린이 속삭였다. 그녀는 귀를 막아도 소리가 뚫고 들어오는 걸 느꼈다. “이건 단순한 클럽 음악이 아니야. 불협화음으로 변질됐어. 라그나르의 속삭임이 섞여 있어.”
라그나르의 등장
순간, 음악이 끊겼다. 붉은 조명만이 어둠을 비추었다. 클럽 안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출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균열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만으로도 공기가 무거워졌다. 날개를 접은 거대한 그림자, 불길처럼 흔들리는 눈.
“라그나르…” 지아가 검을 꺼내며 속삭였다.
괴물은 웃음을 흘렸다. “드디어 만나는군, 무대의 전사들아. 너희의 노래는 달콤했지. 하지만 그 달콤함은 곧 썩어 나를 키운다.”
아린은 귀를 막았다. 그의 목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직접 마음에 파고드는 속삭임이었다. 너의 목소리는 곧 부서질 것이다. 노래를 잃은 아이돌이 무엇이 남겠느냐.
아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유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빛이 아린의 귀와 목을 감싸며 속삭임을 차단했다. “괜찮아. 네 목소리는 우리 모두의 것이야.”
라그나르는 이번에는 지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리더여, 넌 책임의 무게에 짓눌린다. 동료가 쓰러지면, 넌 끝까지 지켜낼 수 있겠느냐?
지아는 눈을 감았다. 수많은 무대에서, 수천 명의 팬 앞에서 느꼈던 부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곧 그녀는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래. 무겁지. 하지만 무게가 있어야 무대도, 삶도 진짜가 되지.”
전투
데몬 무리들이 균열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단순한 괴물들이 아니었다. 사람의 형상을 한 채, 팬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데몬들이었다.
“사랑해, 세레니티!”
“지아 언니, 아린 언니, 우리를 지켜줘!”
그 목소리는 팬들의 환호와 똑같았다. 유나는 눈물을 삼키며 빛의 장벽을 펼쳤다. “거짓 환호에 속지 마!”
지아는 검으로 그 환영들을 베어냈다. 아린은 목소리를 힘겹게 내며 불협화음을 반격했다. 미카는 그림자 속에서 진짜 적의 위치를 찾아냈고, 수현은 방패로 팀을 지켰다.
그러나 라그나르는 균열 속에서 계속 속삭였다. “너희는 결국 무대 위의 장난감일 뿐. 환호는 사라지고, 남는 건 공허뿐이다.”
아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무릎을 꿇을 뻔했지만, 그때 클럽 밖에서 응원봉 불빛이 보였다. 민서였다. 그녀는 지하 입구에서 혼자 응원법을 외치고 있었다.
“둘! 셋! 렛츠—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파동은 뚜렷했다. 세레니티 멤버들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우린 공허를 위해 노래하지 않아!” 지아가 외쳤다. “우린 사람들의 마음을 위해 노래하고 춤춘다!”
다섯 멤버가 동시에 힘을 합쳤다. 지아의 검이 라그나르의 날개를 스쳤고, 아린의 목소리가 균열을 흔들었다. 수현의 방패가 데몬들의 파도를 막아냈고, 미카의 그림자가 라그나르의 발밑을 묶었다. 유나의 빛이 모두의 상처를 치유하며 그들을 지탱했다.
균열은 거대한 비명을 내며 닫혔다. 라그나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의 그림자는 물러났다.
라그나르의 최후의 말
괴물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 속삭임이 도시 전체에 퍼졌다.
“좋다. 나도 무대를 즐긴다. 곧, 너희와 관객 모두가 내 합창이 되리라. 준비해라, 마지막 콘서트가 다가온다.”
결의
전투가 끝난 뒤, 클럽 지하에 남은 것은 부서진 조명과 잿빛 먼지뿐이었다.
아린은 무릎을 짚으며 거칠게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다시 불빛이 돌아왔다.
“내 목소리를 빼앗을 수 없을 거야. 내 목소리는 혼자가 아니니까.”
지아는 멤버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르가 곧 마지막 무대를 준비하고 있어. 하지만 기억해. 무대는 우리의 것, 팬들의 것이야. 절대 그의 제단으로 만들지 않겠어.”
유나는 손을 모으며 속삭였다. “우리가 먼저 준비해야 해. 팬들과 함께, 도시 전체를 무대로.”
민서는 눈부신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응원봉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서울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새로운 무대의 막이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