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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그림자

분단의 그림자 - 제3편 이방희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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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그림자》

제3편 이방희라는 이름

서울 남산 기슭에 자리한 국정원 지하 분석실. 어두운 형광등 불빛 아래, 대형 스크린에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실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위성사진, 도청 기록, 암호 해독 파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요원들의 손은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렸고, 공기는 피로와 긴장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석관 한 명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나왔습니다! 코드명 ‘이방희’… 북한 특수8군단 저격수. 전력 자료 확보했습니다.”

순간, 실내 공기가 얼어붙었다. 모든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한 여성의 얼굴이 있었다. 정밀하게 다듬어진 군사 인물사진. 냉혹한 눈빛, 흐트러짐 없는 자세. 그녀의 이름 옆에는 무수한 전과가 기록되어 있었다.

  • 해외 암살 임무 7회 성공
  • 국경지대 충돌 작전 참여
  • 북한 내부에서조차 전설로 불리는 ‘고스트 스나이퍼’

유중원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깊게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눈에 아른거리는 익숙한 윤곽. 그토록 사랑해온 여인의 얼굴과 겹쳐졌다.

‘안 돼… 이건 우연일 뿐이야. 절대 그럴 리 없어.’

그는 차갑게 식어가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애써 감정을 숨겼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스크린을 떠나지 못했다.


며칠 뒤, 중원은 장길과 함께 이방희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현장 조사에 나섰다. 서울 외곽의 낡은 고시원 건물. 정보망에 따르면, 이방희의 조직원이 잠시 은신처로 사용했던 곳이었다.

“여기선 냄새가 진동하네.” 장길이 코를 막으며 투덜거렸다.
“냄새보다 중요한 건 흔적이다.” 중원은 장갑을 끼고 방 안을 살폈다.

책상 서랍을 열자, 안쪽에 작은 철제 케이스가 나왔다. 열어보니 고급 저격 스코프와 함께, 탄피 하나가 들어 있었다. 중원은 그것을 손에 쥐자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블랙 피어스 탄환.

그리고 그 옆, 노트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북한 특유의 암호문으로 적힌 메모. 번역하자 한 구절이 튀어나왔다.
“이방희, CTX 확보를 최우선으로 한다.”

중원의 목 안이 바짝 말라왔다. 이제는 확실했다. 저격수의 이름은 존재했고, 그녀가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한 목소리가 계속 속삭였다.
‘명현과 닮았다. 너무도 닮았다…’


그날 밤, 중원은 술잔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 있었다. 흔들리는 위스키 잔 속에서 그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수족관의 맑은 물빛, 그 안에서 웃던 명현의 얼굴.

‘만약… 정말 그녀가 이방희라면? 내가 사랑한 시간이 전부 거짓이라면?’

그는 머리를 감싸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감정이 들끓었다. 명현과 함께한 나날은 진짜였다. 그녀의 따뜻한 손길과 눈빛, 그것을 연기라 치부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젠장…” 중원은 잔을 탁자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갈라지는 유리 소리 속에 그의 혼란이 더욱 커졌다.


한편, 북한 간첩 조직의 은신처. 명현, 아니 이방희는 무기 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방금 닦아낸 저격 소총이 들려 있었다. 차갑게 빛나는 총열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조직의 상부에서 내려온 새로운 지령이 그녀를 짓눌렀다. “남북 단일팀 월드컵 예선 경기, 그곳에서 CTX를 사용하라.”

그녀는 총을 내려놓으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나는 군인이다. 감정은 사치다.”

그러나 손끝이 떨렸다. 머릿속에는 중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웃음, 그의 따뜻한 목소리. 그녀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북한의 명령과 인간적인 사랑,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버려야 했다.


며칠 뒤, 국정원은 새로운 첩보를 확보했다. 북한 조직의 무기 거래 브로커가 남대문 인근에서 접선을 시도한다는 정보였다.

중원과 장길은 즉각 투입되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거래가 이뤄지려는 순간, 총격전이 벌어졌다. 중원은 몸을 날려 엄폐 뒤로 굴러들어갔다. 총탄이 벽을 갈기며 튀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다시금 저격수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블랙 피어스 탄환. 소리만 들어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총알은 정확히 국정원 요원의 머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살의가 아닌, 경고에 가까운 사격.

중원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다.’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그는 총을 움켜쥔 채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저격수의 위치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작전이 끝난 뒤, 국정원 내부 회의에서 또다시 보고가 이어졌다.
“분석 결과, 사용된 탄환은 역시 블랙 피어스입니다. 그리고 현장 상황을 종합해보면, 저격수는 의도적으로 우리 요원을 살려두었습니다.”

중원의 손이 움찔했다. 그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물었다.
“즉, 그녀는 언제든 우리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중원은 홀로 복도에 서 있었다.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진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방희, 북한의 전설적인 저격수. 그리고 이명현,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두 이름이 결국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중원은 명현의 수족관을 찾았다. 수조 속을 비추는 푸른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평소처럼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

“오늘 많이 힘들어 보이네.”
“응… 그냥 일이 좀 복잡했어.”

중원은 말끝을 흐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마음속에서 수천 개의 질문이 소용돌이쳤지만, 단 하나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녀가 웃으며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그림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며칠 후, 국정원 분석팀에서 최종 보고가 올라왔다.

“코드명 이방희. 현장 증거, 탄환, 작전 패턴을 종합해 볼 때, 그녀가 현재 서울에 잠입해 있음은 확실합니다. CTX 확보 작전의 중심 인물입니다.”

보고서 마지막 장에 붙은 사진. 인천항, 남대문, 군수창고에서 포착된 흐릿한 이미지 속 여성.

중원은 그 사진을 손에 쥐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이름은, 이제 단순한 코드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자신이 사랑한 여인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의 임무는 단순한 국가적 작전을 넘어섰다.
그는 이제 선택해야 했다.
국가의 요원으로서의 의무, 혹은 한 인간으로서의 사랑.

그리고 그 갈등의 불씨는, 곧 거대한 폭발로 이어질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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