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그림자》
제1편 검은 폭발의 서막
한강 남쪽 도심은 평온해 보였다. 밤이 내려앉은 서울의 도로 위로는 불빛이 흘러내렸고, 네온사인에 젖은 거리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오가며 하루의 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꿈틀대고 있었다. 국정원 대공수사국 소속 특수요원 유중원은 지금 그 어둠의 그림자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포착된 북한 무장 간첩 조직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침투조가 아니었다. 최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며, 군사적으로 고도로 훈련된 특수부대 출신의 요원들이었다. 한국 사회에 은밀히 숨어들어 무기 밀매와 연쇄 폭발 사건을 일으키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사건이 서로 무관한 듯 보였으나, 중원은 본능적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는 걸 직감했다.
특히 최근 정보망에 걸려든 단어 하나가 그를 잠 못 이루게 했다. CTX. 액체 폭약. 세계 어느 곳에서도 아직 실전 배치되지 않은 신형 폭약으로, 소량만으로도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력을 가졌다. 그것은 단순한 테러 도구가 아니었다.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중원은 국정원 본청 지하 작전실에서 동료 요원 이장길과 마주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최근 발생한 폭발 현장의 사진들이 띄워져 있었다. 잿더미가 된 차량 잔해, 불에 그을린 아스팔트, 공포에 휩싸여 도망치는 사람들의 흔적.
“형, 이건 단순한 무기 거래가 아니에요.” 장길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폭발 방식이 너무 정교해요. 군용 폭발물 전문가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중원은 팔짱을 끼고 모니터 속 이미지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이 노리는 건 분명하다. CTX. 아직 남쪽도, 미군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한 물건이지. 북한이 그걸 확보하려 한다면…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전면전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천천히 두드렸다. 그의 뇌리 속에는 오직 하나의 그림만이 맴돌았다. 대한민국의 심장을 겨누는 폭발. 그리고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자신의 사명.
며칠 뒤, 서울 북쪽의 한 폐창고. 이곳은 간첩 조직의 은밀한 은신처였다. 어둠 속에서 무장한 남성들이 무기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고 있었다. 창고 한편에는 검은 금속 상자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외부에서 밀반입된 최신형 소총과 탄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키가 크고 날렵한 체구를 가진 여성, 이방희였다. 그녀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남성 요원들조차 그녀 앞에서는 숨을 고르며 긴장했다. 북한 특수8군단에서 가장 잔혹하면서도 정확한 저격수. 그녀는 인간적 감정을 배제한 기계와도 같았다.
그러나 누구도 몰랐다. 그녀가 남한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명현. 서울 강남의 한 수족관을 운영하는, 평범한 여성. 밝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물고기의 세계를 설명하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따뜻한 일상 속의 한 장면이었다. 그곳을 자주 찾는 연인이자 국정원 요원인 유중원조차, 그녀가 바로 자신이 쫓는 적이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
어느 늦은 밤, 중원은 명현의 수족관을 찾았다. 유리 수조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많이 늦었네.” 명현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평소처럼 따뜻한 목소리였지만, 마음 한켠에는 복잡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녀는 알았다. 언젠가 이 남자가 자신이 지닌 모든 비밀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중원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현아, 너만 있으면 세상 모든 위험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명현은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은 흔들렸다. 북한에서 내려온 순간부터 오직 임무만이 그녀의 존재 이유였는데, 이 남자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랑과 명령, 그 사이에서 갈라지는 균열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다음 날, 국정원에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북한 조직이 대규모 무기 거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였다. 장소는 인천항 부두. 중원과 장길은 즉각 현장으로 투입되었다.
검은 SUV에서 내린 그들은 무선으로 상황을 점검했다. 부두는 어두웠고, 컨테이너 사이로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중원은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저기다. 북한 놈들이 이미 도착했어.”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거대한 폭발이었다. 컨테이너 몇 개가 산산조각나며 하늘로 튀어 올랐다. 충격파가 몰아치자 부두에 있던 차량들이 뒤집혔다. 요원들은 바닥에 몸을 엎드렸고, 중원은 본능적으로 외쳤다.
“폭약 테스트다! 물러서라!”
연기에 가려진 시야 속에서, 그는 분명히 한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다. 장거리 소총을 들고 현장을 지휘하는 한 여인. 그녀의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고, 날카로운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순간, 중원의 심장이 섬뜩하게 멎었다.
그 눈빛. 어딘가 낯익었다.
폭발 사건은 언론에 단순한 산업재해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국정원은 그 사건이 북한 간첩 조직의 폭약 실험임을 확신했다. CTX 확보가 임박했음을 의미했다.
중원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도 머릿속에서 자꾸만 어젯밤 본 여성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왜인지 모르게, 명현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 부정했지만,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
며칠 뒤, 북한 간첩 조직은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그들의 최종 계획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분명 대한민국을 뒤흔들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서막은, 이미 검은 폭발과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