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그림자》
제4편 사랑의 가면, 의심의 그림자
서울의 초겨울 바람은 매섭게 불어왔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장식들이 빛났지만, 유중원의 마음은 그 화려한 불빛과는 정반대로 어두웠다. 그는 수일째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국정원 지하 상황실에 앉아 있었다.
스크린 위에는 “이방희”라는 이름이 굵은 글씨로 떠 있었다. 그녀의 행적을 추적한 지도와 CCTV 캡처들이 연속해서 바뀌어 올라왔다. 서울의 외곽, 인천항, 남대문 시장, 그리고 미확인 은신처. 모든 현장의 흔적 속에 ‘그녀’의 그림자가 있었다.
“형, 이 정도면 거의 확실합니다.” 이장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방희가 서울에 잠입해 있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문제는… 그녀가 언제, 어디서 움직일지라는 거죠.”
중원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명현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따뜻하게 웃던 그녀의 눈빛과, 냉혹한 저격수의 눈빛이 하나로 겹쳐지며 심장을 옥죄었다.
‘설마… 정말 그녀가 이방희일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하지만…’
며칠 후, 중원은 일부러 명현의 수족관을 찾았다. 그날따라 수족관은 손님이 드물었고, 고요한 물속에서 물고기들만 유영하고 있었다.
“중원 씨, 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네요.” 명현은 따뜻한 미소로 차를 건네주었다.
“괜찮아. 그냥 일이 많아서 그래.”
그는 잔을 받아들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태연했다. 그러나 중원의 눈에는, 그 미소 뒤에 뭔가 감춰진 긴장감이 어렴풋이 보였다.
“명현아.”
“응?”
“혹시…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네가 수족관 앞에서 길을 잃은 아이 도와주던 날이잖아.”
그 대답은 정확했다. 그러나 중원은 이상하게도 더 불안해졌다. 그녀의 목소리, 표정,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완벽했다. 마치 연기처럼.
그날 밤, 국정원은 또다시 긴급 작전에 돌입했다. 첩보에 따르면 북한 간첩 조직이 경기도 남부의 비밀 창고에서 CTX 샘플을 거래할 예정이었다.
중원과 장길은 현장에 잠입했다. 창고 안에는 무기 브로커와 간첩 조직원들이 은밀히 거래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상 확인. 저격수 배치 가능성 높음. 주의해.” 중원이 무전으로 지시했다.
순간, 어둠 속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총성이 울렸고, 한 국정원 요원이 쓰러졌다. 탄환은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젠장, 또 저격수다!”
중원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어둠을 살폈다. 높은 건물 옥상에서 스코프가 반짝였다. 그 순간,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녀였다. 총열을 겨눈 자세, 흔들림 없는 눈빛. 모든 게 그와 너무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교전은 격렬하게 이어졌고, 결국 북한 조직은 CTX 일부를 확보한 채 도주했다. 국정원은 큰 피해를 입었고, 언론에는 단순한 폭발물 범죄 사건으로 축소 보도되었다.
작전 후 회의실에서, 장길이 중원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형… 사실대로 말해봐요. 형, 혹시 저격수가 누군지 짐작하는 거 아니에요?”
중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은 침묵 속에서 손가락만 떨고 있었다.
며칠 후, 명현과의 저녁 식사 자리. 그녀는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중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중원은 그 웃음을 더 이상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명현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어?”
그녀의 젓가락이 순간 멈췄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미소를 지었다.
“비밀이라니? 무슨 말이야? 난 그냥 평범하게 살아왔을 뿐이야.”
그 대답은 완벽했다. 하지만 중원의 가슴 속에서는 더 큰 혼란이 일어났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직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를 믿고 싶다는 마음.
그날 밤, 그는 혼자 집에 돌아와 명현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그녀의 웃음, 그녀의 눈빛,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따뜻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진 속 모든 순간이 의심스러웠다.
‘사랑의 얼굴일까, 아니면 가면일까?’
그는 사진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북한 간첩 조직의 본부. 명현은 동료들과 함께 CTX 폭약을 확인하고 있었다. 은밀하게 확보한 소량의 샘플이 금속 용기에 담겨 있었다.
조직의 상부에서 내려온 새로운 명령은 냉혹했다.
“예선 경기장 테러 준비. 시뮬레이션 즉시 시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중원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두 세계의 경계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며칠 뒤, 국정원 본청의 분석팀에서 최종 보고가 내려왔다.
“이번 작전에서 발견된 탄피, 그리고 저격 위치의 흔적을 종합한 결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코드명, 이방희.”
보고서 위에는 한 줄의 결정적 문장이 쓰여 있었다.
“서울 내 활동 중인 이방희의 신분 위장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존재한다.”
중원은 보고서를 손에 쥔 채, 창밖의 어두운 서울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화려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두운 그림자만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다시 명현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고, 아이들이 즐겁게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중원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질문만이 맴돌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인, 그녀는 진짜 누구인가?’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사랑의 가면과 의심의 그림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운명처럼 중원을 옥죄기 시작했다.